나는 사랑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기독교마리아자매회에서 오신분을 만났다. 기독교마리아자매회는 독일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철저한 회개를 통해 생겨난 초교파적 개신교 독신공동체다. 창설자 바실레아 쉴링크는 위로하시는 하나님, 회개등의 저서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고, 철저한 회개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선지자와 같은 분이시다.

방문하신 수녀님은 한국 분이신데 20개국에서 온 자매님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고 계셨다. 언어, 자라온 환경, 문화, 생활 습관 등 모든 것이 다른 외국 분들과 함께 살면 영적 전쟁이 더 심하단다. 하지만 날마다 함께 모여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회개하는 빛 가운데 모임이라는 교제를 가진다는 수녀님의 얼굴엔 평화가 가득해보였다.

한국 사람들은 일을 좋아하고 잘 하지만 일의 귀천을 따집니다. 저도 처음에 자매회에 들어갔을 때 하찮게 보이는 일들은 빨리 해버리고 큰 일, 영적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돌봐주시는 자매님께서 A, B, C를 모르면서 뒤에 있는 것부터 하려고 한다면서 A, B, C를 먼저 잘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겐 청소와 빨래, 설거지 등의 일을 많이 시키셨습니다. 처음엔 그것이 힘들었지만 다른 자매님들을 보니 그분들은 소임을 맡으면 빨리 하기보다 그 과정이 기도가 되기를 원하면서 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성실하게 주님과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작은 일을 할 때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행해야 합니다. 특히 처음 들어온 자매들은 몸으로 하는 일을 주님과 함께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잘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주님의 성품을 항상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일을 하려고 해야 합니다.”

대화가 끝나고 바실레아 쉴링크의 말씀이 담긴 카드묶음을 선물로 주셨다. 내가 뽑은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무슨 일이나 사명이 네게 무거워질 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를 행하라. 사랑은 무거운 일을 가볍게 하며 사랑으로 행한 모든 일을 예수님은 기꺼이 받으신다.”

공동체에 들어온 이후, 많은 일들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 나름대로 일의 가치를 따지게 되었고, 해야 할 일들에 우선순위를 정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드러나고 평가받는 일들은 앞으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일들은 자연스레 뒤로 가게 되었다. 많은 일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다 자위하며 주어진 많은 일들을 해내는 것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달랐다.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아니라 한 가지 일이라도 어떻게 했느냐가 하나님의 평가기준이었다.

때때로 수련과정을 평가받는 중에 그런 하나님의 뜻이 많이 나타났다.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기 원하시며 많은 문제를 풀기보다 틀린 문제를 풀고 넘어가기를 원하셨다. 많은 일을 하게 하신 주님의 뜻은 나의 동기를 순수하게 하시고, 일을 하며 순간순간 나타나는 나의 자아를 깨트리기 원하셨다. 하지만 주님의 관점에 맞추지 않고 계속 나 중심으로 일을 해나가다 보니 일을 해도 쉽게 지치게 되었고, 사소한 부딪힘도 소화하지 못하고 오래 가게 되었다.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주간 시간표가 보였다. 해야 할 일을 매주 적어서 책상 위에 놓는데, 그때마다 화장실 청소는 적어 놓았다가도 늘 뒤로 밀려 지워지고 또 적어 놓곤 했다. 한두 번 미루다 보니 하기 싫고, 해도 빨리 끝내버리려는 마음으로 할 때가 많았다. 이런 나를 아시는 주님은 최근 화장실 청소에 자주 걸리도록 인도하셨다. 그런데 처음 들어온 자매들은 특별히 몸으로 하는 빨래, 청소, 설거지 등을 주님과 함께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어 그날 수도원으로 돌아가 화장실 청소를 했다. 변기를 닦는 나의 손짓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주목하시는 주님의 뜨거운 눈빛이 느껴졌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바닥의 때를 벗기는데 가슴이 벅차오른다. 주님이 원하시는 게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찮게 보이는 일을 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할 때 가장 기쁘게 받으시는 예수님이심을 깨닫는다.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죄인인데도, 왜 나의 사랑을 받기 원하시는 것일까?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내 마음 하나를 얻기 위해 이토록 애쓰시는 것일까? 이유를 알 수 없어 더욱 목이 멘다.

소화 테레사는 다음과 같은 메모를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고 한다.

매 순간 당신은 무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여러분의 대답은 나는 사랑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식당에서?” “나는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가대에서?” “나는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나는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그 사랑으로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섰을 때, 얼마나 사랑했는가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한 만큼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박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