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감옥

청년수련회 기간 동안 어느 자매의 간증이 있었는데, 그것이 나의 마음을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모태신앙으로써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는 엄마의 규제가 너무 싫었는데, 자신은 그동안 행복한 감옥에 있었노라는 고백이었다. “행복한 감옥”이 마음에 깊이 들어와 박혔다. 역시 너무나 강하고 불공평한 것처럼 느껴지는 규제들이 섭섭함으로 밀려오면서 불편함과 답답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속처럼 느껴졌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좀더 편안하게 살고 싶은 안의 애정과 욕망이 짓누르고 있었음을 빗속에서 맨발로 걸으면서 십자가 도보순례를 하는 가운데 주님이 발견케 하셨다.

언젠가 방문했던 수도원의 원장님은, 수도원의 여러 가지 공사를 하면서 몸과 육신이 지쳐 매여 있는 여러 가지 규칙들이 구속처럼 느껴졌고 결국 수도회의 허락을 받아 수도원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산속에서 지내며 요한계시록을 읽던 21 12절의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라는 말씀이 강하게 내려 꽂혔다. ‘아, 천국에도 울타리가 있었구나. 그동안 구속이라고 느꼈던 많은 회칙들과 규제들이 실은 구속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는 영혼의 보호막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시면서 잠깐의 방황을 끝내시고 돌아오셨다.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 있을까? 많은 이들이 구속에서 오는 불편함을 싫어한다. 그러나 구속이 주님께서 나를 이끌어 가시는 은혜의 사슬이다. 불편함과 구차함, 고난과 가난, 멸시와 천대가 싫어 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서조차 땅의 복을 찾는다. 어떤 이들은 가난은 저주요, 병은 저주라고 하면서 쇠사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다. 죄의 쇠사슬에 매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속하시어,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매인 되었던 주님의 십자가는 정작 멀리하고 있다. 태어날 때도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도 십자가에서는 더없이 가난하셨던 주님의 삶과는 너무나 상반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고통과 멸시와 수치와 가난과는 너무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마치 그것이 참된 자유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비() 나의 궁전”이라고 하셨던 이용도 목사님의 삶이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하는 것은 왜일까? “오, 주여! 나를 당신의 겸비의 끈과 은혜의 사슬로 매어주시므로 당신께서 어디로든지 끄시옵소서. 나의 육은 죽여주시고 나의 영이 주님과 더불어 교통하게 하옵소서. , 주여! 나는 압니다. 주님의 자취를 온전히 따라가노라면 욕됨과 수치됨이 얼마나 많을는지. 맞음, 옥에 갇힘, 죽임을 당함. , 이런 선물이 앞에는 얼마든지 있겠지요. 그러나 주께서만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는 모든 핍박을 당하려 하나이다. 주님도 당하셨으매 나도 당함이 마땅하나이다.

이용도 목사님께서 김익선 형제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구속함의 유익함을 다시 깨닫게 된다. “형님,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십니까? 그러하면 병도 형님에게 유익함이 되고 가난함도 형님에게 유익함이 것입니다. 그것은 형님의 심령에 무한한 은혜를 주시는 표요, 무한한 교훈이요, 무한한 징계인 압니다. 가운데서 주님의 사람과 은혜와 교훈을 찾으십시오. 건강할 때에 찾을 없는 은혜는 가운데서라야 찾을 있는 것입니다. 고로 어떤 성도는 병석을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이번 기회는 하나님께서 형님에게 무엇을 보이려고 하시는 것인즉 놓치지 말고 찾아보세요. 그것만 참으면 형님은 일어설 것입니다. 그것만 찾으면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고, 병들어도 좋고, 건강해도 좋고 유익함이 것입니다. 세상에는 병도 있어야 마땅하고 가난과 다른 모든 난관이 있어야 마땅하며 죽음도 있어야 마땅합니다. 주님 안에 갇혀 사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감옥에 갇힘과 매임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서 어떠한 음성을 듣는가? 가난해도, 병이 들어도, 감옥에 갇혀도 그곳에 주님이 계시다면, 그곳에 주님의 영광이 임한다면 그곳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란 행복한 감옥이라고 하였다. 그곳이 어디라도, 어떠한 고통이 따를지라도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시편26:6).

분도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표양을 본받는 자는 가난하게 사는 자인 줄로 생각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와 같이 고통과 비하를 받는 자가 가난한 자라고 여기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었다. 가난에 매여 사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거나 구차하게 여기지 않았다. 가난으로 인해 부끄러워하거나 비굴해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옷감을 덧대어 기운 옷을 입고도, 변변한 신발 없이 맨발로 다녀도, 꿀꿀이죽 같은 밥을 얻어먹을지라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도리어 얼마나 가난을 좋아하였던지 이것을 재산으로 여겼으며, 극도로 빈곤 중에 지내면서도 유쾌히 지내었다. 주님 때문에 가난에 매여 사는 것을 진실로 기쁨으로 여겼다.  어떤이의 고백을 들어보라.

 “인간의 참된 행복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외적인 조건에 있지 않아요. 그러므로 저와 같이 외적인 조건이 불행스럽게 보인다 할지라도 저와 같은 사람이 행복이라고 증거한다면 그것이 바로 순수한 행복이라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수하고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저로 하여금 병상에서 불행한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생활하도록 섭리하신 같아요. 사람이 건강하고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세상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생활을 하면서 만족해하며 기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된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몸이나 부요한 물질이나 높은 지위 권세가 없고 불행한 조건들 가운데서 생활할지라도 하나님의 위로가 은혜 가운데 살기 때문에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순수하고 참된 행복이라고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통해서만 얻을 있는 참된 영적 행복에 대하여 강력하게 증거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병을 고치지 않으시고 40 동안 누워서만 살게 하신 같습니다.

가난, 고통, 육체의 질병 등이 나를 얽어매는 사슬처럼 느껴지고 무언가 규제하는 말들이 성가시고 귀찮고 불편하고 억압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영혼을 지키는 보호막임을 감사해야 한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은혜의 통로임을 기억해야 한다.

, 어서 속히 모든 정과 욕망을 십자가에 철저히 박고 주님께만 매인바 되어 영원한 행복의 문으로 들어가고 싶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