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에 아카시아 꽃향기가 가득하다. 아카시아 꽃말은 ‘비밀’,‘ 숨겨진 사랑’을 뜻한다고 한다. 신명기 10 3절에 나오는 ‘싯딤’나무가 바로 아카시아나무다. 아카시아나무 의 히브리어가 ‘싯타’인데 우리 성경에는 ‘싯딤’ 조각목으로 번역되어 있다(41:19).

이스라엘 광야에서 자라는 아카시아 나무는 토양이 좋고 물이 넉넉한 지역에서 자라는 것과는 그 모양이 아주 다르다. 우선 잎사귀가 아주 작고 가늘고 뾰족하게 생겼다. 그리고 내구성이 강해 외부로부터 벌레가 침투하기 어렵다. 아카시아 나무는 저항력과 내구성이 뛰어나 70인역 성경에 서 아카시아 나무를 썩지 않는 나무라고 하였다.

주 서식지는 시나이반도와 이스라엘 광야지대로 뿌리가 아주 깊은 나무다. 짧게는 오십 미터에서 길게는 2백 미터까지 뿌리를 내려서 우기에 얻은 수분으로 건기를 버티는, 대단한 생존전략을 지닌 나무다. 열악한 기후에도 든든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종말에는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하나님을 위해 법궤를 만드는 데 드려진, 희생을 아는 나무다(25:10).

이스라엘 백성이 아카시아 나무로 성막을 짓고, 성막 기물을 만드는 신성한 나무로 여기는 것처럼, 바벨론에서는 이 나무를 생명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나도 하나님 앞에서 저 아카시아 나무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바람이 인다.

뿌리 깊은 나무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 밖에 나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던 이세종 선생님의 말씀이 가슴을 때린다.

주님을 따른다고, 좁고 협착한 길을 걷겠노라고 지금까지 걸어왔건만 여전히 뿌리가 얕은 나무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도 이 땅은 자갈밭이라 아무리 좋은 연장을 사용해도 소용없다고 원망불평을 늘어놓기 일쑤다. 얕게 파고 어설프게 파니 모든 게 엉성하다. 더욱이 말씀을 삶 가운데 깊이 체험해 볼 리 만무하다. 교만과 안일함에 빠져 비와 창수와 바람에 금방 무너질 모래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우는 줄도 모른 채 나름 깊이 판 줄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생활 구석구석에 달팽이집을 짊어지고 다니면서도 일들이 많다는 핑계만 늘어놓으면서 영성생활의 쟁기를 놓은 채 살아가고 있다. “이건 다 문어발처럼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일 때문이 니 고랑 안 판다고 너무 몰아치지 마세요.”라며 자신의 삶을 잘도 정당화하고 있다. 얕게 파니 영혼이 점점 죽어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이러 저리 두리번거리며 좀더 쉽고 좀 더 편한 자리만 찾고 있다.

“주님, 보세요. 애꿎은 황무지 땅만 일구다가 호미에 찍혀 팔다리 할 것 없이 온몸이 다 시퍼렇게 멍들고 쑤시잖아요. 머리도 지끈거리고 괜히 마음고생만 하고 이게 뭐예요. 아휴, 뜨거운 태양 때문에 머리도 빙빙 돌고 가슴도 죄어오고 이제 너무 지쳤다고요. 무슨 성과가 있어야지요. 좁디좁은 땅 말고, 좀더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넓은 땅, 비옥한 땅을 주세요. 그러면 정말 깊이깊이 팔 수 있다고요. 옆 사람과 부딪칠 필요도 없고 마음고생도 할 필요도 없고 좀 좋아요.

내 주장, 내 권리를 내세우며 목소리만 점점 높아져갔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건만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채 지쳐버린 베드로. 주님 없이 살아가는 나의 삶이 퍽퍽할 수밖에 없건만, 노상 환경 탓, 사람 탓, 일 탓만 하면서 우거지상을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영성생활의 그물이 이리저리 찢기고 구멍이 났는데도 다시 엮을 생각도 안하고 있다. 엉성해지고 약해진 틈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세속의 파도가 휘몰아친다. 이에 배(사명)가 깨지고 구멍이 나서 흙탕물이 들어오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이만하면 잘 감당하고 있노라고 영적 교만에 깊이 빠져 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아무래도 정신 번쩍 들게 날벼락을 맞아야 할 모양이다.

뜨거운 햇볕과 물도 없는 사막지대에서 건기일 때 도리어 뿌리를 더 깊이 내리는 저 아카시아 나무처럼 진리의 뿌리를 깊이깊이 내릴 수는 없을까. 먼지요 티끌에 불과한 이 육신덩어리, 구더기 같은 흙집에 왜 이리도 연연해하는 지 정말 못났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하시듯 내게도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많은 사람이 가지 않는 좁은 길일지라도 반석 위에 차근차근 집을 지어라. 곧 전무후무한 대환난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때를 대비하며  진리로 든든히 무장하여, 믿음의 뿌리를 깊이깊이 내려라. 그것만이 살길이다. 아무리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너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라.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기까지 끝까지 싸워라. 저 아카시아 나무처럼 세속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고 벌레(정욕)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저항력을 키워라. 지금 투정 부릴 때가 아니다. 내면이 강한 사람이 되어라. 인내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니라.

숨겨진 사랑을 찾아서

콜베 사제가 일본에서 문서선교를 할 때 잡지를 출간할 식공들의 파업과 불매운동까지 전개되어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 수사들도 힘을 잃고 어찌할 바 몰라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그는 좌절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용기를 냅시다.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라면서 펜을 들었다. 많은 양의 잡지를 혼자 만드느라 손끝이 헐어 피가 나기까지 하였다. 설사가상으로 음식이 맞지 않아서 다리에 종기가 났는데, 걷다가 넘어져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넘어뜨리고자 쉴 사이 없이 공격을 하였다.

그 해 겨울 기관지염으로 동생인 알퐁소 사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고난이 깊어질수록 더 깊이깊이 뿌리를 내렸다. 본원에서는 알퐁소 사제 후임으로 그를 불러들였지만 편한 곳보다 좀더 불편한 그곳에 남기를 원했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든든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아카시아 나무처럼 말이다. “주님의 뜻을 따르되 가장 어렵고 위태로운 시기일수록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십자가는 생각을 순화시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우리에게 오직 사랑에서 우러나온 마음으로 일하도 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체험할 수 없다. 만세 전부터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준비된 영광을 얻고자,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가자.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2:7).

남들이 가지 않는 좁은 길일지라도, 외롭고 고독한 길일지라도, 십자가 지고 이리저리 부딪히더라고 묵묵히 이 길을 걷노라면 언젠가는 모든 육신의 껍질을 벗은 후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내 영혼 안에 열리게 되리라.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연단을 받으며 하늘의 소망을 품고, 마음에 가득히 부어질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가자. 그날을 소망하며 용기를 내서 다시 일어나자. 영원한 생명을 얻기까지 이 광야 길을 열심히 달려가고 싶다. 샘물로 닦고 또 닦아 아카시아 골짜기를 이루고 싶다.

“그날이 오면, 산마다 포도즙이 흐르고 언덕마다 젖이 흥건하리라. 유다의 모든 시내에 물이 넘쳐흐르고 야훼의 성전에서 샘물이 솟아 아카시아 골짜기를 적시리라”(3:18).

마지막 날, 아낌없이 순교의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는 그날까지 뒤로 물러서서 침륜에 빠지지 말고 믿음의 용사로 굳건히 서고 싶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