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신 예수님

어느 시대에나 나라, 사회, 개인 등이 망한다면 그것은 분명 죄가 이유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4:7)라고 했다. 성경에서 말해주는 흥망성쇠는 죄와 관련이 있느냐 없느냐의 기준에서 비롯된다. 창세기의 아담이 그랬고, 홍수심판을 받은 노아시대의 사람들이 그랬고,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그랬으며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다.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고 버림받는 모형을 보여주었고 신약에 이르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망하는 이유를 ‘죄’로 결론지어 말씀하신다.

이는 달리 말하면 거룩한 사람, 즉 의인(義人)이 한사람도 없다는 결론을 얻어 낼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가.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 그런데 소돔성에는 의인이 없었다. 결국 심판을 면하지 못하고 말았다. 참고 참고 또 참으시지만 주님께서 기뻐하실만한 단 한 사람의 의인이 없어서 심판의 불을 내리셔야 하는 주님의 심정을 우리가 알 수 있을까.

영국의 사학자 토인비는 “역사의 운명은 지배적 소수에 달려 있다”고 했다. 창조적 소수, 신앙으로 철저하게 영적인 소수, 즉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 한 사람이 있고 없음에 그 나라와 공동체의 운명이 좌우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5:1).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도 의인 한 사람이 있으면 예루살렘 성을 용서하겠다고 했다.

크고 높은 기준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한 사람의 의인과 독대하셨고, 그 한 사람을 통해 공동체와 민족을 이끌어 오셨고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셨다.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의 사사들과 왕들, 그리고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이다. 언제나 주님의 초점은 의인에게 향해 있으셨고 그 한 사람을 통해 세워가고 이루어 가셨다.

그런데 이제 시대가 변했다. 사람들은 작은 일, 오래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을 싫어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세상 속에서 적응해 가다보면 오랜 기다림은 촌스러움이 되고, 느림이 되고 발전을 막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그것의 적용을 영적인 것에까지 하다 보니 교회는 세상의 법을 쫓아 어설픈 흉내를 내면서 변화를 꾀하고 그것이 합리화 되어 신앙의 경계선을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크고 화려하며 남 보기에 좋은 것들이 선악과처럼 우리를 유혹하고 보암직한 그것, 먹음직한 그것, 지혜로울 것 같은 그 탐스러움에 우리는 영적인 철저함의 경계를 과감하게 무너뜨린다. 주님도 이해해 주시겠지, 라는 그럴듯한 자기 안위로 주님 앞에도 당당하기만 하다.

작은 자, 작은 것들, 소자,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 라고 말씀하시던 주님의 천국적 기준들은 세상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기만 하다. 주님의 일을 내세울 때조차 돈과 명예가 기준이 되고 큰 건물이 기준이 되기도 한다. 성도의 수, 선교, 봉사 등 보여주는 것들이 주는 달콤함은, 교회와 성도들을 흔들고 하나님의 종이라 부름 받은 목회자들과 사역자들을 넘어뜨리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라는 기준이 신앙적 자랑이 되고, 축복의 범위가 물질과 명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 건물은 크고 아름답지만 그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의인이 몇 명이나 될까. 주님은 아실테지만 말이다.

위대한 한 사람들

지금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4:35)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 되신 예수님처럼, 롯의 중보자가 된 아브라함처럼, ‘나’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갈2:20),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진실한 중보자가 되기를 기도하며 나아가야 한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가 내가 되기를, 내가 속한 공동체와 나라가 단체가 거룩한 뜻을 품고 그 뜻을 저버리지 않으며 끝까지 인내하기를 소원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어딘가에 숨어있는 의인들이 되지 않으면 우리가 속한 단체와 민족은 재앙과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 나를 비방하고 판단해도 내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면 그 말이 들리지 않거나 아주 작게 들리다 스쳐간다. 그러나 바로 서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말은 화를 일으키고 분노를 일으키다 침륜에 빠지게도 한다. 유독 나를 보면 인사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나와 일하기 싫어하고, 나를 유난히 미워하는 것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한 사람’이 될 절호의 기회다. 더 주님 앞에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신호다.

맨발로 일생을 살면서 지하철을 누비던 ‘그 한 사람’ 최춘선 성자는, 미운 사람이 없고 싫은 사람도 없이 주님 때문에 그저 행복하기만 하다며 미소로 고백하지 않았던가.

인도의 마더 테레사가 위대한 것은, 이루어 낸 크고 위대한 일 때문이 아니다. 그 일들 속에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예수님 때문에 라고 하는 전제가 있었고, 그것이 밑거름이었고, 그것이 기적과 놀라운 힘을 거룩하게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고, 인내하고, 용서하면서 이룬 인격적인 변화와 관계들이 거룩함을 철저하게 완성해 나갔기 때문이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40여년의 지독한 병상생활 가운데서 주님을 증거하며 하늘의 지혜로 주님오심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처럼 사셨던 그분은, 주님과 동거하는 기쁨에 고통의 순간들이 하루 한 날처럼 훌쩍 지나간 것 같다고 행복한 고백을 하였다.

한 사람 되기

내가 일생 한 사람만을 목회하는 목회자라면 어떠한가. 정말 작다고 여겨지는 단체에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을 한다면 또한 어떠한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은 똑같은 일만 일생 해 왔고 해 가야 한다면 또한 어떠한가. 그것이 우리 주님 때문이라면. 주님이 원하신다면.

내 사역에, 내 신앙의 터 위에, 단 한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거룩한 변화를 꿈꾸고 있고 그것을 돕는 일을 하는 나라면, 나의 사역은 위대한 것이 아니겠는가.

일을 위한 일, 인격의 변화가 없이 희생하고 인내하고 봉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가능하다. 주님을 보여 줄 수 없다면 그 일은 일에 그칠 뿐이다. 또한 오래 가지도 못한다. 죄인인 내가 들어간 일에 위대함은 없다. 나를 내세우느라 주님을 높여 드릴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앞서다 보면 깊고 높은 주님 뜻이 빠지기 때문이다. 내가 무익해지고 나를 인도하시는 그 분, 측량치 못할 자비와 사랑이 넘치시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이 드러날 때, 그 일은 위대해지고 빛이 나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의 한 사람이 되어 다오.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되어 다오.” 애타하시는 호소에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실천만 하면 된다.

우리의 모든 고단함과 사역의 피곤함,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편함, 그리고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괴로움, 물질, 혈연, 자녀, 기타 등등 세상에서 이겨야 하는 수많은 꺼리들이 있고 그 가운데 우리가 서 있다. 주님의 한 사람으로 말이다. 잊지 말라! 나는 주님께서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내가 되길, 침노하자! 간절하게 소망하고 갈망하자!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