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봉꾼이 사도 바울 다음 서열로

c5a9b1e2baafc8af_c4abb8a3c5b8b0ed_b9d9b6어머니 덕을 톡톡히 본 사람 하면 어거스틴을 손꼽을 것이다. 모니카와 어거스틴(354-430)은 붙어 다니는 이름처럼 늘 함께 회자된다. 북아프리카 알제리 땅에서 태어나 17세에 이웃 나라 지금의 튀니지, 당시 아프리카 제일의 도시 카르타고에 유학을 떠나면서 난봉끼는 거침없이 표출되었다. 부유한 아버지 덕분에 이탈리아의 로마와 밀라노까지 세상의 바람과 높은 학문을 접촉하는 행운을 누렸으나, 라틴 교부의 일인자가 될 그가 온갖 수렁에 빠져 헤맨 시기이기도 했다.

난봉꾼의 흔적이 묻어 있는 거리에서

그리스도를 태양과 혼동하고, 자기는 그리스도가 인정한 성령이라고 말하는 마니 교리의 유혹에 넘어가 8년간 마니교의 신봉자가 되었다. 부정한 성관계로 19세에 아이를 낳고 로마에 가서는 또 다른 여자와 관계 맺는 난잡한 성적 충동에 끌려 다녔다.

12년간 공부하려고 머물렀던 카르타고는 머물러서는 안 될 도시였다. 구약성경에 아합과 그 아내 시돈(레바논) 여자 이세벨이 나온다(왕상16:31). 아합 왕가가 몰락할 때쯤 이세벨의 조카 피그말리온(두로 왕)과 여동생 엘리사(혹은 디도)가 있었는데, 엘리사가 돈 많은 삼촌과 결혼한 후 그 남편이 죽자 오빠를 피해 탈출하게 되었다.

레바논을 떠난 엘리사 공주가 80명의 남자를 대동하고 키프로스에 가서 아내 될 80명의 여자를 데리고 카르타고에 도착했다. 당시 그 지역의 통치자와 담판을 벌인다. 소가죽 껍질로 두를 수 있는 땅을 달라고 하여 허락을 받았는데, 아주 큰 땅을 차지하여 바르사(소가죽 껍질이란 뜻) 언덕과 바다를 연결하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는 건국 신화가 있다(BC 800).

이 나라가 바로 로마세력을 대적할 수 있는 강국이 되어 유명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을 배출시켰다. 페니키아 문명을 융성시켰고 바알문화가 자리잡았다. 여기에 오늘날 도벳 신당의 흔적이 남아 있다(렘7:31). 자녀를 불태워 죽이는 제사다. 서울에 세종대왕을 기념하여 세종로, 이순신을 기념하는 충무로가 있듯이 이곳도 거리 이름이 다양하다. 한니발 거리, 모니카 거리, 어거스틴 거리, 기가 막힌 것은 바알암몬 거리도 있다. 과거 유명했던 것은 다 거리 이름으로 붙인 것 같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진리처럼 이곳에는 교회도 아주 왕성한 역사를 가진다. 대형교회의 흔적은 무너져 흩어진 돌기둥으로 증명한다. 어거스틴 이전에 유명한 터툴리안, 키프리안 같은 교부가 이곳에 있었다. 키프리안 교회 혹은 모니카 기념교회라고 하는, 바닷가에 있는 돌 몇 개의 흔적만 남아 있는, 분명히 아름다웠을 교회는 모니카의 눈물이 배인 곳이다. 점심때가 되자 가까운 곳의 대학교 학생들이 이곳에 몰려 와서 빵과 음료수를 마시면서 잡담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거스틴과 모니카를 알아야 하지 않느냐 호소하고 싶었다.

아들이 이곳에 와서 방탕하게 산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가 고향에서 달려온 것이다. 이 교회에서 어머니 모니카 성녀는 밤낮없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아들이 로마로 가자, 불타는 심정으로 로마까지 뒤쫓아 기도의 기름을 퍼부었다. 로마에 가서 너무나 지친 어머니는 암부로스에게 하소연을 한다. 그때 그는 세기적인 유명한 말을 남긴다.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얼마 후 지루한 세월이 흘러 18년 만에 그 아들이 하나님 품에 안기는 벅찬 감격을 맛보았고, 34세의 아들과 함께 사교(司敎) 암부로스에게 세례를 받는다. 어거스틴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미리 많은 사람을 동원하신 것 같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어머니의 기도는 대단한 힘이다.

어거스틴은 방탕한 삶을 살고 있던 19세 때 키케로의 ‘호루텐슈스’라는 대화록을 읽고 영혼이 눈 뜨여 고상한 생활에 들어가려는 정신적 혁명의 충동을 받았다. 그의 첫 회심이라고도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신 플라톤 학파의 영향을 받은 빅토리너스의 회심 이야기는 어거스틴을 감동시켰다. 안토니의 수도생활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암부로스 사교를 만난 것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접근이었다. 드디어 387년 정원을 걷고 있는데 주위에서 소리가 들린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 계시와 같은 음성이었다. 이 순간 모든 어두움의 장막은 말끔히 벗겨지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밀라노를 떠나는 도중 위급한 어머니의 병환 소식이 들렸고 모니카는 아들의 회개를 본 다음 달 5월, 387년 56세에 승리자의 환한 얼굴로 본향에 가셨다.

c4abb8a3c5b8b0ed21.png참회의 삶을 새기고 간 거룩한 거목

어거스틴은 회심 후 388년 카르타고에 갔다가 고향에 들러 부친의 유산을 정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어거스틴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집도 전답도 버리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 말씀을 명상하며 단식과 기도와 선행으로 하나님만 섬기고 살았다.

이런 일화가 있다. 회심 후 어느 날 길을 걷는데 옛날 사귀던 여인이 따라왔다. 모른 척하고 지나가려는데 그 여자가 “나예요. 왜 모른 척하고 지나가세요?” 하더란다. 그때 어거스틴은 “당신은 당신이지만 나는 내가 아니오.”라고 했다. 회심 후 완전히 새사람이 된 것이다. 391년 어떤 부자를 회개시키려고 힙포에 갔다가 강권으로 사제가 되었고 그곳에 제2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후 힙포의 사교가 되었다. 수도원 규칙은 그 안에서 누구나 사유물을 갖지 못하고 필수품만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 수도원은 부근 교회에 교역자를 제공하는 중요한 공급원이 되었다. 수도원에서 섬기던 사람들이 힙포 교회의 성직자로 임명되기 시작했다. 그는 바른 신앙을 확립하기 위해 싸우고 노력했다. 당시 게으른 방랑 수도사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수도사의 노동에 관하여』라는 책에 써서 건전한 수도사의 길을 가르쳤다. 특히 이단들과의 싸움에 혼신을 다하며 논쟁하였고, 순수 기독교복음을 사수하는 데 바친 그의 헌신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저술가로서 사도 바울 다음의 신학자와 성자로 꼽힌다. 평생 93권의 책을 썼다. 로마가 고르(Gaur) 족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지자 『신국론』(神國論)이라는 대 저술을 남겼다. 45세 때 쓴 『고백록』은 그의 방황과 유년시절을 기록한 책이다. 전기라기보다는 감사와 회개에서 나온 봉헌물이라는 점이다.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인 『기독교교양』도 걸작이라 할 것이다. 이단과의 논쟁에서는 지금 우리가 믿는 신앙의 정수를 남겨 놓았다.

“원죄의 절망적 상태에서 인간은 아무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구속주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온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이나 복음을 스스로 순종할 능력을 갖지 못한다. 만일 죄인이 믿고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창조 전에 영생하도록 예정하신 자들에게 베풀어진다. 그러므로 신앙은 죄인의 자유 의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피택자(被澤者)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물꼬를 준비하였던 이론적 사상가였으며, 그의 신앙체계는 17,18세기를 거쳐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일평생 위의 압박과 가슴의 고통으로 건강이 좋지 못했으나 거룩한 서적을 흡족히 남겼다.

하늘나라 가기 11일 전, 병세가 악화되어 의사와 음식 나르는 사람 이외는 출입을 막았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고요히 기도 생활을 보내고자 했다. “참회의 시편” 일부 내용을 양피지에 큰 글자로 썼다. 누워서 보이는 맞은편 벽에 붙여 놓고 읽으며 눈물 가운데 영혼을 맑게 했다. 430년 8월 28일 76세에 사교들이 그의 병상 곁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거목은 하늘나라로 부르심을 받았다.

성자의 얼이 다시 살아나길

그러나 영원히 기념할 만한 보배로운 성자를 그의 고국은 외면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고향이라 불리는 알제리 슈크라스에 도착해 어거스틴의 기념관이라 불리는 10평 정도의 단면 건물을 방문했다. 100m 거리에 있는 성당을 빼앗아 시청 건물로 쓰고 있는 직원이 기념관 담당자라고 뛰어와 문을 열어주었다. 너무나도 초라한 건물과 내용물 때문에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거스틴 생전에 있었던 몇 가지 동판 그림들과 어머니의 교훈 등을 기록한 것이 진열되어 있었다. 여기서 언덕을 조금 오르면 어거스틴이 명상했다는 올리브 나무가 커다란 고목으로 서 있다. 수천 년 된 나무란다. 그 나무 마당 옆에 2층 건물이 서 있다. 10평 정도나 될까. 어거스틴의 가계와 친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2층으로 계단을 밟아 올라가면 시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콘크리트 지붕에 서게 된다. 위성접시가 집마다 달려 있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준비는 다 되어 있구나’ 하는 희망적 해석을 하고 싶었다.

거기서 200m 정도 걸어가서 어거스틴의 생가라는 집으로 안내받았다. 자동차로 그곳까지 가면서 대화 중, 어거스틴 집은 알 수 없다는 관광청 장관의 말을 들었다는 우리 사역자의 예비지식을 들은 터였다. 분명히 동네는 이곳이지만 집은 알 수 없다는 상식을 깨고 여기가 생가라고 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당에 무덤이 있고 마당 옆에 아주 아름다운 작은 모스크가 서 있다. 둥근 돔으로 된 이 화려한 모스크는 소원을 간구하는 곳이란다.

마당 가운데 무덤은 아주 유명한 이맘(성직자)이 이 집에서 출생했는데, 그 어머니의 무덤이란다. 어거스틴과 그 어머니를 모욕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 힘을 빼앗기면 농락당하는 법이다. 성자의 고향은 거의 찾는 이 없는 모슬렘 마을이 되었다. 성자의 얼을 가진 강한 어거스틴 후손을 만들어야 한다는 다짐을 하였다.

어거스틴이 감독으로 있었던, 지금은 안나바(Annaba)라 부르는 힙포를 방문했다. 어거스틴 기념성당과 그의 동상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쫛쫛교회라는 표식이 있어야 하는데 성당이나 동상이나, 어디에도 간판이 없다. 98퍼센트가 모슬렘인 이 나라의 모든 성당이나 교회가 관공서나 공공건물로 빼앗겨 사용되는데, 이 건물만은 로마 교황청의 특별 노력으로 기념성당으로 회복되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강단 정면에 어거스틴 시신이 있는 관이 놓여 있고 그 옆에 팔뼈가 따로 놓여 있다. 성자들의 성체를 숭상하는 관습은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었다. 영업차량 운전사의 말에 따르면 어거스틴을 철학자 중의 하나로 알고 있으며 시민들은 거의 모른다는 것이다. 성당 뒤의 건물이 제법 큰 덩치로 서 있다. 노인 요양원이 있어서 수녀들이 돌보고 있다. 거의 모슬렘 노인들이다. 힙포는 과거에 큰 도시였고 지금은 폐허가 되었으나 적은 규모의 박물관이 당시 위용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여기서도 외면당하고 있었다. 성자의 참모습을 살려야 하리라.

어느 날 그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큰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한 일이 있었다. “선생님, 하나님께 소중한 은사를 구한다면 어떤 은사를 간구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성자는 거침없이 겸손을 구하리라 했다. 만일 두 번째를 구한다면? 하는 물음에 역시 겸손의 은사라 했다. 세 번째는요? 그 답변도 역시 겸손이라 말했다. 향기로운 일화가 우리를 채찍질한다. 지구 최대의 학자이며 성자인 어거스틴 앞에 우리는 너무나 거들먹거리는 추한 모습을 보이며 방정을 떠는 것 같다. 겸허히 엎드려 배워야 하고 흠모해야만 할 그분의 영성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와는 감정이 좋지 않으시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성자는 이 길을 조용히 따르라 하시는 것 같다.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