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관통(貫通)하고 있는 두 노선

사자와 어린양의 노선을 성경의 원역사(原歷史, 창세기 1-11)에서 추적해보자. 창세기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속성의 어떠함을 근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인류의 현상에 대한 거울이 된다. 실낙원에서 복낙원(復樂園) 턱밑까지 사자와 어린양의 유비(類比)적 묘사는 끊이지 않고 전개된다.

인류의 대표자 아담은 피조물의 자리가 싫어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금지된 선악과를 먹고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죽음이란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어 에덴에서 쫓겨난 비극이었다. 아담은 살인자 가인으로 이어진다. 가인은 약자 아벨을 살인했다. 가인은 라멕으로 이어진다. 라멕은 이름 강한 남자라는 뜻이 의미하듯 당대 철기문화를 중심으로 강한 힘과 문명의 위용을 자랑한 위인이다. 라멕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그의 거만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4:24). 이 선언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 문명의 악한 속성을 그대로 표현한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인간은 과감하게 제거하고, 가혹한 보복을 감행하는 인간 사회의 속성이다. 인류문명이 발달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힘의 행사가 일곱에서 일흔일곱으로 발전한다. 일흔일곱은 단순한 산술급수적 증가가 아니고, 완전수의 기하급수적인 확대를 의미한다. 문명의 악한 속성이 전방위적으로 증폭됨을 말해준다.

라멕은 더 큰 힘의 상징인 네피림으로 이어진다. 네피림은 신인합작이 만든 거인들이었다. 킹제임스 번역은 네피림을 거인(Giant)으로 번역했다.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合作)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작품이다. 하나님의 작품이라고만 하면 전능성은 있지만, 인간의 뜻이 그곳에 들어있지 않아서 뭔가 섭섭하고 부족한데, 신이 사람과 함께 만든 작품이라면 전능자의 능력에다 인간의 소원을 담은 작품이 된다. 이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이다. 그 이상은 없다.

고대 신화에 자주 나오는 신과 인간이 때로는 필요에 따라 전쟁도 하고 사랑도 해서 뭔가 사람들의 최대 소원을 담아낸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많이 나오는 이야기다. 성경에서도 당시의 신화를 사용하여 의도하는 것을 기록하였다. 이 네피림을 위골(威骨)이 장대하고라고 표현했다. 아마 고대 인간은 신장도 오늘 우리보다 짧았을 것이다. 전쟁을 치러야 하는 고대인들은 언제나 자이언트가 되어 적을 물리치는 소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상상해 낸 위골이 장대한 인간의 키는 얼마나 될까? 사람의 키가 3m라고 가상해보자. 크고 장대한 서구인들 앞에 가 보라. 위압감을 느낀다. 네 발로 기는 어린아이가 우뚝 선 어른을 만날 때 심한 위압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 네피림이 당대에 위골을 자랑하며 최악의 강포로 천하를 평정하고 있었다. 네피림이 나오면서 하나님은 이 땅에 사람 만든 것을 후회했다. ‘이건 아닌데.’ 하시면서.

그후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내어 저주를 받은 함의 아들 가나안의 역사는 지역, 인구학적으로 가장 많이 번성한 자로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흔히 우리가 믿고 생각하는 저주가 소멸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강한 자의 출현과 세력의 확대로 표현된다는 데 혼란이 생긴다. 창세기 10장의 기록에서 노아 아들들의 각 계보의 숫자를 세어보아라. 저주받았다고 하는 함의 아들 가나안의 계보가 가장 강성한 가계로 나오고 있다. 계보의 숫자만이 아니다. 당시 차지하고 있는 땅의 영역도 지도를 짚어가며 살펴보면 가장 광활한 땅에서 번성하고 있었다. 실은 시날 땅에서 바벨탑을 주도하여 하나님을 대적했던 주동 인물이 함의 후손인 니므롯이라는 당대 호걸 영웅이 아닌가! 그러나 결국 바벨성은 세상 제국의 어떠함을 보여주는 마지막 실물교육이 되었다(11, 18).

사자의 노선은 바벨탑에서 그 결국이 여실히 드러났다. 힘의 기반을 둔 사자의 세계가 종말을 맞는다는 실물적 교훈이 바벨탑 사건이다. 그 바벨의 세계가 점점 확대되어 계시록 마지막에 가서는 제국으로 폭로된다. 바벨론은 고대국가 가운데 가장 찬란했던 국가다. 그러나 이 공룡 제국(큰 성 바벨론) 역시 순식간에 무너진다. 누구도 그 제국이 무너질 것을 예상 못하여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라고 반복표현을 통해 그 제국의 종말을 묘사한다. 자신의 왕국(self-kingdom)을 세워 자기 이름으로 영원한 결집을 도모하여 하늘까지 위용을 떨치고 싶은 욕망은 하루아침에 홀연히 무너져 버린다. 바벨론 제국의 구성원들을 보라! 한결같이 거대한 사자들이다. 주도 면밀한 정경(政經), 권언(勸言)유착은 거대한 공룡의 세계도 만들고, 그 세계는 어린양을 먹이(prey)로 삼아 제국의 힘을 행사하지만, 그 힘은 시한부적이다. 한때 그렇게 잘 나가던 큰 성 제국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거대 제국의 허망함을 목격하리라.

세상 제국의 역사 발전과정에서 표면적으로 언제나 사자들이 판을 친다. 그러나 자세히 행간을 읽어보라. 그곳에서 우리는 어린양의 발자취를 추적할 수 있다. 가인의 계보와는 다른 아벨을 대신한 계보 이야기가 새롭게 등장한다(4:25-26). 표면적으로는 사자와 독수리의 판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린양의 나라가 선명하게 비친다. 무대에서 판 치는 사자들 이면에 있는 어린양의 세계를 읽을 수 있다.

셋은 허락하다.’를 뜻하며 에노스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뜻한다. 힘의 강포 속에서도 여실히 하나님의 뜻으로 허락된 사람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벨, 에녹, 노아, 셈족의 대표자인 아브라함 등이 모두 사자들에게 치어서 명함도 내놓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승리의 나라의 디딤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믿음의 조상들이 놓아준 다리를 통해서 역사의 사람들은 주의 나라 백성이 된 것이다.

노아를 예로 들어보자. 당대 네피림 시대에 모두가 사자나 독수리처럼 강포가 이 땅에 가득 찰 때 노아의 등장은 어린양의 상징이었다. 물론 그 시대정신을 따라 함께 참여하지 않고 구별되었다는 점에서 당대의 의인이라고 부른다. 모두가 땅에서 올라온 무엇을 가지고 천하를 평정하고자 할 때 그의 이름이 주는 상징성은 이 어린양을 대신하기에 충분하였다. 그 이름의 뜻은 위로(慰勞)’ 또는 푹 쉬다(안식)’를 뜻한다. 위로와 안식은 사자들이 판을 치는 전장(戰場)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단어다. 오직 사자나 독수리의 성질이 아닌 어린양의 세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이름이 위로와 안식의 뜻인 노아라는 인물이었다.

무한경쟁의 세계에서 수고와 고통으로 시달려야 하는 현실임에도 진정한 위로의 존재로 노아를 묘사함으로써, 노아는 강포한 시대에 강력한 희망의 표징을 가진 어린양으로 상징된다. 인간의 타락이 임계점에 이르자 하나님은 인간 전부를 진멸시키고 새로 시작하기로 한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 땅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은 쓸어버리시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 즉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 묘사한다. 이것이 두 세계의 다른 점이다. 하나는 인간이 도모한 것으로 땅에서 올라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땅에서 올라온 모든 것(인간이 만든 것)은 소멸하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혜)은 영원하다는 게 성서의 주제다. (계속)

김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