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그 나라, 어머니

bfb5bcbac8c6b7c31.jpg수도원 계단을 오르다가 다리가 욱신거려 난간을 잡으며 고개를 드니 파란 하늘이 참 맑고 좋다. 가을 햇살에 붉게 물든 담장이 넝쿨과 노란 단풍, 빨간 감나무 잎 사이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저 너머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저수지의 물을 보니 고향 생각이 난다.

오늘도 가을걷이를 하시고 늦은 저녁 이 못난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실 어머니. 수도사가 되어 수도원에 들어와서 명절날도 생신 때도 한번 찾아뵙지 못하는데 너 좋아하는 수수부침이 해줄 테니 시간되면, 꼭 한번 내려오라고 하신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듯하다. 어릴 적 감 따러 갈 때 긴 대나무 장대를 메고 어머니와 함께 홍시를 따러갔다. 가지를 대나무로 꺾어 빨간 홍시를 따주시던 따스한 어머니의 손길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오늘따라 어머니가 왜 이리도 보고 싶은 걸까? 수도자로서 하나님만을 사랑하고자 부모, 형제간의 애정을 끊어버리고 살아온 30여년의 세월이건만, 인간의 본성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마음 깊은 곳에 숨길 수 없는 그리움이 강하게 밀려온다.

사람에게는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나보다.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천국을 그리워하고, 친구를 그리워하고,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 중에 제일은 우리 마음의 고향인 어머니일 것이다. 삶이 힘겨울 때, 세상이 어려울 때, 맨 먼저 부르는 이름이 어머니다.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 배가 고플 때, 병들었을 때도 어머니를 부른다. 객지에 나가 지치고 외로울 때도 불러보고 싶은 이름은 어머니다. 죽어가며 마지막 부르고 싶은 이름도 어머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난 최초의 스승이다. 인생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가치를 배우며 사랑을 배운다. 어머니의 품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요, 어머니의 등은 가장 따뜻한 침실이다. 어머니의 무릎은 교실이었고, 어머니의 말씀은 진리의 바다요, 어머니의 눈동자는 등불이었다.

오랜만에 어머니하고 이름을 불러본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폐인처럼 되어버린 못난 아들을 포기치 않으셨던 어머니. 아무런 희망도 없는 폐결핵으로 다 죽어가는 아들을 붙들고 왜 죽어! 왜 죽어! 에미가 있는데, 정신 차리고 어서 눈 떠봐!” 통곡하시던 어머니. 나의 목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우시던 어머니. 그 연약하고 얌전하신 분이 아들 살리려고 혼자 개를 때려잡으시고, 아들 병에 좋다면 천리만리 마다하지 않고 단숨에 달려가 구해 오셨던 어머니.

우리 주님께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꾼처럼 조롱하고 욕하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모욕을 가하였다. 피를 뚝뚝 흘리시면서 고통에 가득 찬 아들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의 어머니가 서 계셨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 그 고통 가운데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어머니, 요한을 보십시오. 오늘부터 요한은 어머니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제자 요한에게는 또 이렇게 부탁하셨다. “요한아, 오늘부터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날부터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예수님의 어머니, 그분은 십자가 곁에까지 가는 영원한 사랑의 화신이었다. 예수님의 친구들도, 동족도 주님을 버렸고, 제자들마저 도망을 쳤으나, 주님의 어머니만큼은 십자가 곁에 서 계셨다. 죽음의 골짜기라도 아들을 따라가는 어머니. 사랑하는 아들의 이마가 가시관에 무참히 찔려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면서도 그 상처를 싸매줄 수가 없으셨던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얼굴과 온 몸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를 바라보기만 하셨던 찢어지는 그 아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주님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달아나지도, 거절하지도,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으셨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계셨던 마리아 같은 어머니는 없으셨다. 마리아는 뛰어난 사랑과 인내와 용기를 지닌 어머니이셨다.

나의 어머니는 폐결핵에 뱀탕이 좋다고 하니까 뱀을 때려잡아 고아 먹이셨다. 난 그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은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빅토르 위고의 말처럼 어머니는 강하다. 영국의 시인 키를링의 노래이다.

내가 비록 높은 산에서 못 박혀도 누구의 사랑이 나를 따를지 나는 아노라. 바다 속에 빠지더라도 누구의 눈물이 나를 적실 것을 나는 아노라. 그것은 어머니의 눈물. 내가 비록 몸과 영혼이 저주를 받을지라도 누구의 기도가 나를 온전케 할지 나는 아노라. 그것은 어머니의 기도.”

참으로 그렇다. 우리의 어머니는 고독한 우리들의 영혼을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어리석은 육신을 어지신 눈매로 지켜주시며, 피곤한 우리의 심신을 평화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영원한 안식처요 영원한 향수이다. 우리의 어머니는 사랑덩어리다. 당신은 아프면서도 자녀에게는 몸조심하라 하고, 끼니를 굶으면서도 못난 아들 따뜻한 밥해서 주시고, 하루도 쉬지 않으면서 우리에게는 쉬어가면서 하라고 하신다. 당신은 추위에 떨면서도 우리에게 따스한 속옷 사 보내시고, 당신은 부스러기만 잡수시면서도 우리에게는 제일 좋은 것으로만 먹이시는 어머니. 매질보다 눈물로, 설교보다 기도로, 권위보다 사랑으로, 교훈보다 감동으로, 채찍보다 위로로, 증오보다 사랑으로 키워주신 어머니. 어머니의 그 사랑을 어찌 다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사형수들이 죽어가면서 제일 많이 부르는 이름도,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들도 어머니를 제일 많이 부른다고 한다. 황량한 광야에서 삶이 고달파 힘들고 어려울 때 부르는 이름이 바로 어머니다. 오늘 같이 오동잎이 떨어지는 가을밤 조용히 불러보고 싶은 이름도 어머니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부르는 이름도 어머니이고, 마지막에 부르다가 죽어갈 이름도 어머니이시다.

우리의 어머니는 지금 우리에게 살과 피와 목숨을 나눠주시느라고 검은 머리 파뿌리처럼 희어지셨다. 그 곱디고운 얼굴은 쭈글쭈글하게 굵은 주름이 패고, 빛나던 눈은 푹 꺼지고, 잔등은 굽어 앙상한 뼈와 손등엔 힘줄이 말라 휘어져 있다. 오늘도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시며 기도하시는 어머니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충만하게 해달라고 우리 주님께 기도하자.

죽음의 골짜기, 십자가 곁에까지 따라가신 어머니 마리아의 그 용기를 닮자. 십자가에 달려 그 붉은 피를 다 쏟으시고 우리의 속죄주가 되신 예수님을 주님의 어머니처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함을 회개하자.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시선을 내려놓으며 무릎에 안으시고 눈물을 흘리시던 슬픔의 어머니. 그 슬픔의 길을 지나 주님께로 나아갔던 그 걸음을 우리도 따라가자. 칼로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주님만을 사랑하셨던 어머니의 가슴을 지니자.

광야길이 지치고 힘들 때, 어머니처럼 드넓은 주님의 마음과 희생을 헤아려 보면, 우리 가는 길은 조금 더 따뜻하고 힘이 날 것이다. 천국은 사랑 가득한 나라, 어머니와 같은 나라다.

낡은 육신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눈물도 고통도 없는 그 나라에서 어머니와 영원토록 살아갈 것을 알기에 우리는 행복하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