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에 대한 바른 이해

이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복 받기를 원하고 좋아한다. 축복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성경이 가르쳐주는 영적인 복을 대부분 육적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욕적인 것 곧 육신적인 것에 맞춰서 증거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욥을 예로 들 때에도 많은 환난과 고통을 받은 후에 물질 축복, 자녀 축복을 크게 받았다고 증거 한다. 세상 복에 초점을 맞추어 욥을 바라보는 것이다. 욥은 늘 집에서 성결의식을 할 정도로 자신뿐 아니라 자녀들이 죄를 지을까하여 자식의 죄 문제에 대해서 철저했다. 성화(聖化)되는 삶을 열심히 추구한 분이었다. 이와 같은 욥이었기 때문에 더 깨끗한 그릇이 되게 하기 위해 세상적인 모든 소유를 버리는 아픔을 겪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욥에 대해서 어떤 목사님은 해석하시기를 욥이 그런 고통을 받게 된 것은 걱정, 근심을 많이 하니까 마귀가 큰 시련을 주었다고 증거를 하신다. 그 후 믿음이 회복되니까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되었다고 하신다. 이 목사님은 욥의 고난을 자아를 깨뜨려 더 온전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보지 않으신다.

이렇게 소유를 버리는 과정을 통해서 욥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되는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욥이 많은 환난 고통을 겪으면서 영혼이 잘되므로 범사에도 잘되게 하신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게 되면 물질적인 축복, 세상적인 축복은 덤으로 주시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강단에서 십일조는 복 받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된다고 증거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인데 이 땅에서 몇 곱절 받을 욕심을 갖고 헌금을 한다면 대단히 부끄러운 것이다. 땅에 축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빛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진리가 있기에 단지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세로 있으면 덤으로 오는 축복이 있다. 즉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병 고침을 받거나 물질축복을 받거나 그밖에 여러 가지 은혜와 축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분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복을 넉넉할 때 주시지 않았다. 창고에 물질을 쌓아두고, 통장에 돈을 많이 저축했을 때 그런 물질축복을 주신 것이 아니다. 많은 고난 가운데 기적이 나타난 것이다. 오병이어나 칠병이어의 기적을 보면 넉넉하고 물질적으로 풍성한 사람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분명히 그런 기적은 가난할 때, 어려울 때, 배고파서 광야에서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때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기적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당할 때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의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사렙다 과부에게 나타난 기적도 흉년 때문에 얼마나 고생할 때인가? 그런데도 남은 기름, 남은 밀가루를 가지고 떡을 만들어 엘리야를 대접하니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이다. 애굽에서 나와 은금패물이 있고 먹을 것이 있을 때 하나님이 축복하셨는가? 기적을 베푸셨는가? 아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모든 것이 떨어졌을 때 나타난 기적이었다.

그런데 넉넉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축복, 축복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보지 못하고 누룩을 섞어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고 싶으면 가지고 있는 물질을 먼저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사용하고, 교회 개척에 물질을 헌신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고, 전도하는데 사용하고, 가지고 있는 것으로 먼저 사용하라. 그리고 다 드려서 없으면 그때 필요를 따라 하나님이 주신다. 이것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어떤 목사님은 복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이 우리 성도들을 부요케 하기 위함이라고 잘못 해석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일생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집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듯이 청빈하게 사셨다. 이렇게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 대로 갚아주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나라이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이 세상에서 행한 것에 따라 갚으신다는 것인데 땅에서 크게 축복받을 것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이 축복사상으로 가득찬 분들은 성경 어디를 보든지 세상축복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한다. 예수님이 가난하시게 되신 것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게 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다. 천국에 들어가면 완전무결한 건강도 있고 완전한 축복, 모든 필요가 준비되어 있다. 이것이 천년 그리스도의 왕국이요, 새 하늘과 새 땅에 펼쳐질 영원한 천국이다. 이것을 보장하시겠다는 뜻인데 현재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누릴 것으로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많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은 병 고치는 역사, 물질 축복, 자녀의 축복 등 이 세상에서 덤으로 받는 축복을 앞세우고 있다. 반대로 이런 것을 모두 무시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교회시대 동안 탁월한 영적 지도자들의 삶을 보면 세상적인 축복을 거의 받지 않으신 것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어거스틴, 프랜시스 등의 삶을 보면 세상 것은 배설물로 여기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좁은 길을 철저하게 달려가신 분들이었다. 이들은 불쌍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물질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자신을 위해서는 엄격한 절제생활을 한 분들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은 많이 살아야 80~90년 산다. 사람이 죽게 되면 이 세상에서 받은 축복들은 모두 물거품과 같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성도라면 영원한 천국에 상급을 쌓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