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사랑이다.


죄 짐이 무겁고 한없이 나약한 영혼이 십자가 아래 있다.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온몸을 적신다. ‘깨끗해지고 싶습니다.’ 갈구하며 애처로운 눈동자로 십자가에 달리신 작은 얼굴을 올려다본다. 고통스러운 모습에 연민과 자비하심이 가득하다.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데 아무 힘과 능력이 없기에 아뢴다.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에 비교할 수조차 없겠지만 제게 주어진 고통을 짊어지겠습니다.’

현재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어떤 고통을 받아야 하고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묵상한다. 인적이 없는 사막으로 들어가 사막교부들처럼 은둔생활을 할 수도 없고, 주님 친히 달리신 십자가에 달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고통을 어떻게 받아야 하지요?’ 자연스런 질문을 던진다. 고요함속에 사랑이라는 한 단어가 떠오를 뿐 아무 것도 없다. 사랑과 고통의 연관성을 묵상한다.

십자가 지고 가시는 주님이 겹쳐 보인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무수한 군중들의 폭언과 냉담, 증오에 찬 얼굴들을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현실은 고통과 슬픔 자체인데 예수님은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반전을 준비하고 계셨다. 영원한 구원과 소망을 선물로 주기 위해서 모든 것을 사랑으로 끌어안으시며 모범이 되셨다. 사랑하는 이유에는 어떤 이유도 필요치 않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기에 악을 미워하고 선을 추구합시다. 악을 행하는 형제가 있을지라도 그 형제를 사랑하고 보듬어줍시다. 사랑함으로 서로 존경하며 존경을 받기보다는 먼저 존경하기에 솔선수범합시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이를 축복해 주고 똑같이 괴롭게 하지 맙시다. 즐거운 일이 있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슬픔 속에 있는 사람과 함께 울어주며 위로합시다.

어느 누구에게도 악을 돌려주지 말고 모든 이들에게 선을 베풀어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찬양합시다.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시니 스스로가 원수를 만들거나 갚지 맙시다. 다만 원수에게 사랑으로만 되갚아줍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깁시다”(12:9-21).

바울 사도의 말씀이 귓가에 생생하게 전해온다. “원수를 사랑하라.” 깊은 원한 관계라거나 지워질 수 없는 실수와 상처를 준 대상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일상 속 서로 다른 성격, 가치관과 생각, 습관들로 인한 무수한 부딪침 속에서 상처받고 아파하고 괴로워한다. 설령 오해나 선입견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며 판단하는 이들로 인해 무자비한 공격을 당해 찢기고 상한 영혼은 증오의 칼날을 세운다.

못마땅함과 미움으로 가득 차 울부짖는 영혼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우리 함께 사랑하자.”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곧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고, 내가 받은 상처와 상처 준 대상의 상처까지도 끌어안는 것이 순수한 사랑 그 자체이다. 상대방의 고통하며 신음하는 그 신음이 나의 신음이요 내 눈물이다. 내 고통을 나눠져 주시는 주님의 십자가가 사랑인 까닭이다. 나는 연약하고 부족하여 자주 넘어진다. 하지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일어선다. 주님 안에서 내 고통이 사랑으로 승화될 희망을 갖기 때문이다.

사랑이신 예수님, 상하고 찢긴 제 마음을 어루만져주소서. 못 박히신 고통의 손으로 제 맘을 만져 주사 미움과 증오는 사라지고 용서와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소서. 제가 당하는 모든 고통이 사랑이게 하옵소서. 사랑의 빛으로 다시 비춰질 것입니다. 고통의 과정이 괴롭고 슬프고 힘들다 해도 십자가를 바라보고만 나아가겠습니다. 위대한 그 사랑의 열매를 바라보며 한 걸음씩 내 딛겠습니다.”

가다보면 어느 날엔가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고통이 사랑이 되어 있을 테지. 고통의 새싹이 돋아나 비와 바람과 뜨거운 햇볕을 맞으며 무럭무럭 자라나서 결국 사랑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겠지. 그때 환하게 웃으며, 모든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음을 기뻐하게 되겠지. 허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