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흔적을 찾아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팔복(八福) / 윤동주

 


영원히 슬퍼하여라

이 시를 쓰던 1940년대의 윤동주는 시대와 시인의 내면과 사회와 미래까지를 아우르며 고뇌하고 있었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고 싶었지만, 펼쳐진 삶의 번민과 고통은 내면에 숨겨진 팔복의 아이러니를 되짚으며 내내 울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보여진다.

여덟 가지의 큰 복들이 합쳐 한 가지의 영원한 슬픔이 되는 것으로 시를 쓴 윤동주는, 당연한 기대에 대해 전혀 뜻밖의 결말을 말한다. ‘팔복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는 결말 이외에 다른 결말이 있을 수 없다고 느껴진다. 다른 한편으론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으므로 영원히 슬퍼하는 자는 영원히 복이 있다는 역설도 성립된다. 말을 바꾸어 영원한 복을 받기 위해서는 영원히 슬퍼해야 한다는 말도 성립된다. 강렬한 역설이다. 울지 않고 복을 받을 수 없고, 슬프지 않고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본다.

지금 웃는 자, 행복한 자, 젖먹이는 자, 그리고 슬프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 하신다.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범주 내의 답을 기대하고 그러한 답을 예상하며 희망한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리신다.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같이 정욕을 제어하며 잠시만 살라고 했더니,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심지어 그럴듯한 이유들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우리에게, 주님이 주신 답은 슬퍼하며 울라는 것이었다. 천국적인 드높은 가치와 기준을, 이 땅의 기준으로 매 순간 끌어 내리고, 이 땅의 안락함에 취해 영원한 기쁨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삶에 대해 날카롭고 분명하게 경고하신다. 울어라. 그리고 슬퍼하여라. 그래야 영원히 행복 할 수 있다.

주님이 만드신 처음 세상에서 살다가 타락하여 쫓겨난 이들이 만든 세상은, 회복을 위한 소망과 처절한 회개의 삶이 아닌, 그저 즐겁고 기쁜 것들로의 욕망으로 점철되는 현실이 되었다. 삶과 가치는 이제 천국적인 것들을 말하지 않고, 이 땅에서 안일하며 풍족하게 사는 삶을 주님이 주신 축복으로 정의하는 오류를 범하기에 이르고 만다.

주님은 더 강력하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고, 사람들은 더 매정하게, 원수 맺으며 원통함을 풀지 못한 채 악과 부조리의 늪으로 서로 밀어 넣으며, 원망과 미움으로 하나님을 향한 반역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한다.

거위 이야기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목사였던 키에르케고르는 경건한 풍자로 유명하다. 그의 풍자 가운데 거위 이야기가 있다.

거위들이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이 자리에서 한 마리의 수거위가 설교를 했는데, 거위들에게 얼마나 숭고한 사명이 주어졌는지 말했다. “창조주는예배에 참석한 암거위들은 창조주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모두 허리를 굽히고, 수거위들은 고개를 숙였다. 창조주는 은총 안에서 모든 거위들에게 날개를 주었고, 모든 거위들은 이 날개를 사용해 강 건너 복지로 날아갈 수 있다는 설교였다. 언젠가 자유롭게 본향으로 날아가는 게 그들의 사명이다. 그들은 주일마다 이 설교를 듣지만, 집회가 끝나면 저마다 맡은 바 일을 하기 위해 자기 집으로 다시 비틀거리며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만이다. 거위들은 식성이 좋아서 곧 통통해졌고, 포동포동 살이 올라 먹음직스럽게 되었다. 그리고는 축제 전날 밤에 집주인에게 잡아먹혔다.

창조주에게 요구받았던 목표를 향해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사용하려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거위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언제가 올 죽음에 대비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느끼는 자신의 건강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괴로워하며 비쩍 말라가는 거위들도 더러 있었다. 이런 거위들을 볼 때마다 현실적인다른 거위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다고 날 수 있겠어. 날개에 집착하다 보면, 저들처럼 말라빠지고, 발육도 못 하고, 우리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받을 수 없어. 우리는 그분 은총으로 이렇게 포동포동 살이 찌고 먹음직하게 되었잖아. 우린 지금 충분히 건강해.” 그렇다고 거위들은 날개를 떼어 버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도 주일 외에는 날개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운동을 하지 않았고, 예배 때에 잠시 하는 경건한 허리 운동과 목 운동으로 만족했다.

키에르케고르는 당시 기독교가 이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하였다.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하는 현실,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되지 못하는 것, 그리스도인이 날지 못하는 거위가 된 것,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된 우리가 모질고 완악한 자가 된 것, 세상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우리를 신뢰하지 않는 것. 밝은 빛을 전하러 나가는 우리에게 빛을 먼저 보이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그럴 필요 없다고, 이미 다 보았다고 말하는 현실.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나. 예수님을 어떻게 전해주고 십자가의 은총을 말할 수 있나. 현실에 안주한 살찐 거위의 모습으로.

 


그래도 성령은 역사하신다

매년 두 차례 있어지는 청소년 수련회가 끝났다. 세상에 가장 밀착된 청소년들의 심령을 깨워주실 분은 성령님뿐이시니 강하게 역사하시길 원하고 또 원하며 준비를 하였다. 청소년들에게 오직 예배와 찬양, 영성 프로그램들 속에서만 지내게 하는 일은 보통 고통이 아니다. 평소에 분신처럼 들고 살던 스마트폰과 자유를 내려놓고, 경건시간에만 묶어두는 일은 교사로서도 보기 힘든 일이었다. 전국적으로 최고의 폭염이 발표되던 날은 마침 아침부터 저녁까지 야외 미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땡볕에 습지공원의 모기와 습한 기운을 받으며 천국 가는 길 체험을 훈련받던 아이들은 경찰에 신고하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며 온갖 불평과 불만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교사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오직 성령의 역사를 믿으며 기도하고 나아가면서갔던 시간들이었기에 주님을 부르며 나아갔다.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기도회 때마다 그들이 마음을 열고 주님을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고, 가장 피곤하고 힘들었던 날, 최고로 집중해서 무릎 꿇고 앉아 주님을 부르며 손을 드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 날,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나누던 시간, 간증과 고백을 하던 청소년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더 열심히 내겠노라 결단하였다. 세상을 사랑하던 모습들이 부끄럽고, 이젠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는 진실한 고백들이 눈물로 이어졌다. 지금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며 슬픈 기색으로 울던 그들의 눈물에 주님은 화답하셨으리라 본다. 긴장의 연속으로 마음이 무겁던 나도, “나의 삶에 예수님의 흔적 있으니 나는 오직 주님만 사랑하리라라는 찬양을 부르는데, 울컥 온 마음이 동하면서 눈물이 뜨겁게 흘러넘쳤다. 부족하지만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만을 위해 사는 날들의 고단함을 느낄 때마다 누르고 눌렀던 설움이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세상의 가치 있는 그 모든 전부를 다 준다 해도 주님만 할까. 진주보화를 알고 달려가는 길에, 작은 비바람들은 잔잔하게 밀려와 간지럼을 태우는 작은 파도와 같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주님만, 주님만 부르며 나아가는 길에 주님은 답하신다.

지금 우는 자는 행복하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너희 몸에 새겨진 십자가의 흔적을 표적삼아 오늘도 달려가라. 천국이 너희의 것이다. 너희를 위해 준비된 것을 받아 누리라.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