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하는 길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고진하 빈들


눈먼 자들의 노래

빈들은, 사람도 자연도 없고 나무 열매도 없는 바람만 서걱거리는 곳이다. 황망하고 외로워서 내일이라는 희망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거기, 모든 이들이 좋아하지 않는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이 있다.

포학한 청년 사울이 다메섹이라는 불신과 분노의 길을 가고 있을 때, 그의 눈을 멀게 한 당신이 있었다. 그는 사울의 눈을 단숨에 멀게 하시더니, 당신은 누구냐고 묻자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지금까지 확신하며 믿고 사랑하며 보았던 모든 것들을 다 지우게 하시는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신이, 사랑이라는 뜨거움을 마음 가득 부어주시자 사울의 마음에 단단한 기둥 하나가 세워졌고, 그 기둥에 새로운 마음이 묶여지더니 캄캄하게 감겼던 눈이 떠졌다. 그리고 세상이 달라졌다. 지금까지의 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이 놓여 있음을 보게 된 것이다. 포학과 분노로 채워진 길이 아닌, 나는 없어지고 당신만 드러나는 길로 가고 싶은 열망이 생겨났다. 자신의 마음에 중심처럼 우뚝 세워진 기둥에 자신을 묶어두고 그 뜨거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새로운 길로 나아갔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고 거룩한 것에 매인 바 되어 자신의 삶을 운행하시는 당신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되었다. 사도행전 9:20절에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고 한다. 삶이 바뀌었다. 주님만 보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아. 증거가 없어. 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는 최상의 종교도 아니야.” 퉁명스러운 말투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던 17세 소년은 15년 후 같은 친구에게 전혀 다른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 즉, 실제로 있었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그 존재를 보여주신 하나님이 곧 기독교다.”

20세기에 가장 사랑받고 널리 읽힌 기독교 작가인 C .S. 루이스의 고백이다. 그는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등의 책을 통해 기독인들이 고민해온 신학적 질문들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고통의 문제등에서 무신론과 허무주의에 대해 반박하는 논리는 아무리 철저한 무신론자라도 입을 다물게 할 수준이다.

우리는 다 이렇게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다. 어느 순간 우리 안에 성령으로 들어오신 주님을 여러 통로로 만나게 된 후 세상에 대하여, 인정에 대하여 눈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을 사모하고 바라보며 달려가는 눈먼 자들이 되었다.


매인 바 되어

사도바울은, 온갖 인간의 한계를 넘는 시련들을 경험한 것도 모자라 3차 전도여행에서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갔다(20:22). 환난과 결박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길을 포기할 수 없었다. 마음에 매인 바 된 그 것,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는 순간부터 강렬하게 사로잡아 꼼작 못하게 붙잡아 두던 힘의 근원이며 사랑의 대상이었던 주님. 그 분이 원하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당할 일들은 죽음도 불사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마음에 매인 바 된 사랑의 힘이 그의 발길을 가게 했다.

어쩔 수 없는 한계 가운데서 인생을 시작하여 그것을 뛰어 넘기 위해 발버둥 치며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그렇게 살았던 야곱은 홀로 빈들에 서 있었다. 온몸을 덮는 허기와 추위. 외로움과 두려움. 불안감으로 떨고 있는 텅 빈 들판에서 야곱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들어오시는 그분을 만나게 된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일찍이 아버지 집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그곳에서 경험하면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의 영광을 본다. 그곳은 더 이상 외로운 들판이 아니라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 되었다. 피곤하고 지친 마음과 육신을 위로하려 잠이나 청하려 했던 그 자리가 거룩한 예배의 제단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야곱의 일생 또한 죽음 이상의 고통으로 보내는 날들이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칭함을 받고 새 이름을 받기까지, 야곱 자신의 고백대로 험악한 세월을 견뎌왔다.


다시 그 길

예수님을 만난 감격의 순간부터 어쩌면 우리는, 바울이나 야곱처럼, 죽음을 향해서 가는 여정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를 죽이고, 주님 만나기 전의 삶을 지우고 버리고 일을 하는, 결국은 그 오랜 과정을 험악한 세월처럼 살아내야 영원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의 신분이 이 땅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소명 받았기 때문에 언제나 그 본분에 맞는 삶과 가치관을 지녀야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해 질 수 있다.

아주 잠시, 한 눈을 팔거나 마음에 매인 예수님이라는 끈을 풀어버리면 가차 없이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의 밥이 되기도 하고, 사명이 약해지고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주님은, 언제나 새로운 길을 제시하시고 열어주시면서 다시, 또 다시 걷게 하시고 일어서게 하시고 힘을 주시는 분임을 기억한다. 넘어져서 울고 있을까 했는데, 손을 내미시며 다음 행보를 알려주신다. 가고 있는 길을 멈추고 다시 새로운 길을 가야 하나 싶을 때도 어김없이 이끄시고 만지시고 결단케 하신다. 언제나 우리의 길은 다시, 또 그 길이다. 주님이 인도하시고 이끌어주시는, 주님에게 묶인 그 길을 갈 뿐이다.

오래 이어지는 무더위와 긴 장마가 이어질 때, 맑은 하늘을 기대하며 추적추적 쏟아지는 흐린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긴 시간을 견뎌온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견뎌 왔구나. 오래 참고 사랑하느라 인내했구나. 아직 견디고 있구나. 더 갈 수 있겠구나.

하나님의 방법은 끝이 없어서 우리가 측량하고 헤아릴 수 없는 갖가지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늘 주님은 우리보다, 우리 위에서, 우리 앞서 가시면서 그저 믿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사역을 시작한지  일 년이 지났다. 너무 빠르게 지나온 시간들 같은데 벌써 일 년이다. 많은 기도를 하면서 제대로 주님에게 빠져 살 것이라는 굳은 결단이 무색하게, 벌써 지친 마음이 간혹 들기도 한다. 교회 안에서만 자라왔고, 일찍부터 교역자로 십 수 년을 섬겨오던 내 삶에 나름의 자부심과 자신감마저 든 적도 있었는데,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영적인 관리를 해줘야 하는 샤역자가 되어보니 흔히 말하는 보통 일이 아니다.

하지만  기도를 하려고 앉으면 처음 내가 만난 주님이 거기 그대로 계신다. 그 주님은 똑같이 나를 향해 결단의 마음을 주시고 중심에 매인 바 된 그것을 강하게 묶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이 땅에서 우리가 하는 전부가 되길 원하시는당신이신 주님을 우리가 사랑할 수 있어서 영광임을 고백한다. 매번 넘어지고 실패하고 또 절망하여 울지만, 다시 매인 바 되는 그 길로 바울처럼, 야곱처럼 가야만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 죽음도 있고, 배신도 있고, 조롱과 멸시, 가난과 핍박도 있겠지만 가야만 한다.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에게로 가서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영원히 하나 되는 그날을 소망해야 한다. 우리 앞에 당신을 사랑하는 길이 매번 다시 허락됨을 감사하며 보다 드높이.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