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통찰력

애매모호(曖昧模糊)라는 것의 사전적 의미는 말이나 태도 따위가 흐리터분하고 분명하지 못함이다. 한사람의 어떤 행동이나 말이 선인지 악인지 확실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수많은 우리들의 삶속에 모든 것이 다 분명한가? 모두가 선인가? 우리들의 삶속에는 애매모호한 것이 섞여있지는 않는가? 사람과의 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애매모호함은 없는 것일까?

독일 태생의 미국신학자 폴 틸리히는 인간 삶의 특징은, 인간다움이 그렇고 모든 삶이 그렇듯, ‘애매모호함이다. 즉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창조적 힘과 파괴적 힘이 개별적으로도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분리할 수 없이 혼재되어 있다.”라는 말을 했다.

인생의 많은 삶이 애매모호한 것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 애매모호하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창조의 힘인지, 아니면 파괴적 힘인지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차든지 뜨겁든지 분명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애매모호한 미지근한 상태는 토하여 내치신다고 하였다. 여기서 차다고 하는 것은 얼음이 어는 빙점을 말하는 것이고, 뜨겁다는 것은 물이 끓는 100도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태도가 분명해야하고 애매모호한 중간에 있지 말라는 것이다.

애매모호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바로 통찰력이다. 통찰력이란 사물이나 현상을 통찰하는 능력인데, 사물을 환히 꿰뚫어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 날 알렉산더 대왕이 노예들이 일하고 있는 배를 방문하였다. 대왕이 배를 젓는 노예들 옆으로 지나가자 노를 젓던 노예들이 대왕을 바라보면서 간청을 한다. 자기는 이렇게 노예가 될 만한 죄를 지은 자가 아닌데 이상하게 일이 애매모호하게 되어서 여기까지 왔으니 살려달라고 간청을 한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곳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애걸복걸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 유일하게 한 노예만이 앞뒤 좌우를 살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에게 맡겨진 일만 묵묵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왕은 그에게 조용히 다가가 물어 보았다. “자네는 왕인 내가 이곳을 지나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살려달라고 한마디도 말해보지 않느냐.” 그 말을 들은 노예는 왕에게 대답을 하기를 대왕님 나는 나의 죄로 당연히 죽어야할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살아서 목숨을 부지하고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이 정도만 하여도 감사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다른 사람은 다 자신이 죄인이 아닌 의인이라고 강조하는데 너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죄인이니 어찌 깨끗한 의인들 속에 죄인인 자네를 있게 할 수 있겠느냐?”하며 집으로 보냈다는, 알렉산더대왕의 통찰력이 빛나는 이야기이다.

영어에서 통찰력에 해당하는 단어로 ‘insight’ 이외에 ‘penetration’이나 ‘vision’을 들 수 있다. 이 단어들은 모두 보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어떤 형상을 읽어내는 기술이나 능력을 통찰력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통찰력도 필요하지만 영적 통찰력이 더 중요하다. 영적인 세계는 보이지 않기에 더욱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육신의 눈이 감겨있으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눈이 열려 있지 않으면 영적인 세계를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하고 그로 인한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 때일수록 사탄은 사람들의 눈을 세상을 보게 한다. 그리하여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바로 헌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적인 통찰력이 있어야만 한다.

요한복음 12장에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온다. 가롯 유다는 비싼 향유를 소비한다고 비난하였지만, 마리아는 아끼지 않고 그것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마리아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 것이다.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은 예수님께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기억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하셨다. 한 여인의 예리한 통찰력을 통한 한 행동이 기념적인 일이 되어 모두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영적통찰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에서 나오는 힘이다. 성경을 이해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통찰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표면적인 뜻만을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부분도 알아야만 한다. 거꾸로 성경의 이면의 내용을 깨달아졌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통찰력을 얻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통찰력은 또한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영적으로 살아가다보면 수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지나간다. 그러한 삶의 경험과 거기에 대한 지식이 축적됨으로 우리는 영에 민감해지고 영의 흐름을 이해하여 통찰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새 일을 행하셔서 우리의 통찰력을 날마다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새 일을 두려워말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런 경우 대부분 하나님의 새 일을 두려워하여 새로운 통찰력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제한하고 만다. 마지막 때일수록 사탄을 이길 수 있는 통찰력을 얻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되겠다.

이안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