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정신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19:16-23).

본문에 어떤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최고 관심은 영생이다. 그 영생 얻을 방법을 예수님께 물으니 계명을 다 지키고, 그에 더하여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좇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게 된다. 그러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심히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뿐 아니라 어느 시대든지 물질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은 강하다. 유산 문제로 자녀가 부모를 해치고, 형제간 싸우고 연을 끊는 문제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젊은 부자는 우리의 치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소유에 대한 개념이 비단 물질에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소유 개념은 물질을 비롯하여 자존심, 명예, 체면, 자존심, 건강, 가족, 지위 등 내가 귀하게 여기고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수치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 특히 마음에 품고 있는 소유욕은 더욱 남들이 단정 짓기 어려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소유가 천국에 들어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소유에 대해 더욱 극단적인 예를 드신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9).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귀한 소유가 목숨이다. 그런데 주님을 위하여 이것을 버려야 참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소유 개념을 확장시킨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과 주님 뜻을 행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이라 할 것이다. 유형화한 것이든 무형의 형태이든 그것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이 소유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우리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모든 소유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 때문에 부자인 것이 죄냐, 그러면 다들 가난해져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기도 한다. 그래서 잘 정돈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의 주머니에 있는 1억이라는 거금은 소유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큰돈이지만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 뜻이 나타나면 그것을 위하여 언제든지,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고 사용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소유가 아니다. 또 어떤 이는 주머니에 만원밖에 없지만 그것이 큰 소유일 수도 있다. 내 것이라는 소유욕이 강하여 꼭 쥐고 내놓지 않으려는 마음, 불쌍한 이를 보고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앞서 1억 가진 사람보다 더 소유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단적인 예가 두 렙돈을 헌금으로 바친 과부의 이야기다. 예수님이 성전 문 곁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다가 제자들에게 두 렙돈을 바친 과부를 크게 칭찬하신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12:42-44).

한 고드란트는 앗사리온의 사분의 일 금액이다. 한 앗사리온은 십육분의 일 데나리온이다.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간단히 10만원이라 하면 10만원의 육십사분의 일인 1,560원을 넣은 것이다. 2,000원이 안 되는 돈인데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 말씀하셨으니 여기서 생활비는 하루 양식을 살 돈으로 보면 된다. 즉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과 가족이 먹을 양식 살 돈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그 과부와 가족은 하루를 굶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이 이 한 고드란트를 자기 모든 소유라고 표현하신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부가 모든 소유를 내놓았기에 가장 많은 것을 넣었다고 평가하신 것이다. 과부에게 두 렙돈은 더 이상 소유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도량화 계산법으로 우리를 재지 않으신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 때문에 내려놓을 수 있고 비울 수 있고 버릴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으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숫자로 소유가 많다 적다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나는 상대적으로 가난하거나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그것을 주님께 칭찬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 자랑스러워한다면, 그 마음 또한 소유가 되어 우리의 영적 성장을 발목 잡을 테니 말이다.

소유냐 무소유냐 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 것으로 여겨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무소유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쉽게 판단하지 말고 주님이 어떻게 보실지 염두에 두어, 마음속에서 순간순간 탐욕과 소유욕이 일어날 때에 잘 성찰하여 빨리빨리 비워내는 것이 중요하다.

대표적인 예가 삭개오 세리장이다. 키가 작다는 콤플렉스로 인해 당하는 수모를 만회하고자 악착같이 세리 일을 하여 돈을 모았건만,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하룻밤 신세지겠다는 것뿐이었는데 자원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자기 소유를 한 번에 팔아버린다. 재산 절반을 기부하고 불법으로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는 고백은, 단순 계산법으로 여덟 번 중 한 번만 불법을 행한 것이 있어도 모든 재산을 다 내놓아야 하는 엄청난 결단이었다. 실제 그런 상황이 될지라도 삭개오는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악착같이 모아 소유 삼았던 물질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예수님을 모셔들였기 때문이다. 허망한 것을 내려놓고 참된 것을 얻었으니 어찌 밑지는 장사라 하겠는가. 삭개오는 우리보다 현명한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19:9).

기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