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사랑하자

공동체에서 함께 사역하시는 목사님이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발인예배를 드리고 왔다. 얼마 전 혈액 암 진단을 받으시고 병원에 계시다기에 몇 번이나 병문안을 드려야지 했는데, 찾아뵙지 못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만사를 제쳐놓고서라도 찾아뵐 걸, 때늦은 후회를 해본다.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님, 죄송해요.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실 줄 몰랐어요. 이제 주님 품에서 편히 쉬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유월절 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인생과 집은 나팔꽃에 맺힌 이슬과 같은 것, 어느 것이 먼저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잠시 살다 떠나가는 이 세상. 한 사람 한 사람 이슬처럼 떠나가는데,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사랑하자. 떠난 후에 후회 말고 곁에 있는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자. 우리 또한 인생의 마침표를 언제 찍을지 알 수 없기에 끝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을 본받아 오늘 죽을 것처럼 사랑하며 살자. 전도서 기자의 말씀처럼 이 세상의 것들은 모두가 헛되고 헛된 것들이다. 결국은 사랑만이 남는 것이다. 육신의 장막을 벗기 전에 속히 사랑을 베풀자. 한 줌 흙으로 사라질 인생,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랑하다가 죽는 사람이 승리자다. 모든 이들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자. 쓰라린 곤란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가슴에 피고름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심정이 되어 넘치는 사랑을 베풀자. 따지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그냥 무조건 사랑을 베풀자. 갈기갈기 찢겨져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사랑만을 외치셨던 주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나의 피눈물이 보이느냐? 너희들을 향한 사랑의 목마름을. 사랑하여라. 끝까지 사랑하여라. 그것만이 나를 온전히 따를 수 있는 은총의 길이다.”

그동안 교회, 수도회, 신학교 등에서 진리를 따라 함께 살아가자고 했지만 부대끼고 부딪칠 때마다 이웃들에게 미움, 다툼, 시기, 원망, 불평의 화살을 수없이 날렸다. 그러나 이제는 진실된 마음으로 사랑하고 싶다. 나의 남은 인생 몇 날이나 될까. 곧 이를 그날을 준비하며 난 마음에 유서를 쓰고 있다. 더 이상 사랑하는 일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말하고, 사랑으로 희생하며, 아파하며 신음하는 이웃들의 삶에 사랑으로 과감히 뛰어들자. 고통이 따를지라도 사랑하자. 그리고 솔직하게 용서를 빌자. 그동안 말과 눈빛으로, 행실로 상처를 주었던 이웃들에게 다가가 먼저 용서를 청하자. 갚을 것은 갚고, 빌 것은 빌고, 진심으로 무릎을 꿇고 겸손히 엎드리자.

그동안 삶을 되돌아보면 엄청난 죄를 지은 죄인 중의 괴수다. 진실되고 순수한 사랑을 베풀지 못한 어두운 행실을 철저히 회개하며 나아가야겠다. 호리라도 남김없이 사랑의 빚을 다 갚아야 하리라.

나의 성소는 사랑입니다.” 소화 테레사의 말처럼 우리의 가장 큰 사역은 사랑하는 일이다. 모든 이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한 분 한 분의 얼굴을 떠올리며 깊이 고개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고마우신 벗님들이 계셨기에 지금까지 주님 안에서 행복했고 감사했고 기쁘게 살아왔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다.

수도자의 길을 걷도록 이끌어주신 나의 영적 스승님. 그분은 언제나 분에 넘치는 사랑으로 지지리도 못난 이 제자를 섬겨주시고, 고통 중에서도 진정한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부족하나마 수도자의 길을 지금도 걷고 있다. 실수도, 연약함도, 부족한 행실도, 모난 부분도 모두 지극한 겸손으로 껴안으시고 예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몸소 보여주셨던 영적 스승님의 진실된 삶은 나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성결 수도회 수련자들, 교우들, 공동체의 모든 교역자님들과 성도님들, 지체들 한 분 한 분이 다 감사할 따름이다.

주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한 평반 작은 수실, 소중한 나의 골방도 매우 감사하다. 오랜 기간 동반자가 되어 나의 몸을 감싸주었던 해진 수도복, 낡은 검은 가방, 책꽂이의 책들, 빛바랜 낡은 신발 등 소소한 모든 것들이 내 삶의 감사 조건들이다. 가끔 수실에 찾아와 나의 손등을 기어오르는 무당벌레 친구들, 내가 기도하며 눈물 흘릴 때 함께 울어주는 풀벌레들도, 아침에 지저귀는 새들도, 수실 창문을 두들기는 빗님도, 수도원 뒷산 청설모 친구도, 밤하늘을 수놓는 달과 별 친구들도, 따뜻한 봄 햇살도, 새싹을 틔우도록 겨우내 이불이 되어주었던 푸근한 흙들도, 푸름을 머금은 싱그러운 나무들도 그 곁에서 나부끼는 바람 친구들도, 하늘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흘러가는 구름 친구들도 모두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숨결을 온 몸으로 때마다 시마다 찬양하고 있다.

좌골신경통, 목디스크, 안압, 이명, 불면증, 위장병, 심장병, 실명된 오른쪽 눈을 대신하여 자신의 사명을 포기치 않고 최선을 다하는 왼쪽 눈 등 병약한 주인임에도 불평하지 않고 지금까지 나와 함께한 육체에게도 정말 고맙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기관들. , 콩팥, 심장, 대장, 소장 등 모든 것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창조하신 섭리에 따라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사랑으로 일하고 있다.

주님은 사랑의 희생물로 죽으셨습니다.” 소화 테레사는 사랑의 희생제물이 되셨던 주님을 본받아 죽도록 사랑하기 원하였다. 폐결핵이 걸려 각혈을 하며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동료를 위해 온 힘을 다하여 중보기도를 드리고, 고통을 사랑으로 하나님께 바쳤다. “사랑으로 행한 아주 작고 가장 드러나지 않는 행동은 종종 위대한 일들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행위의 가치가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의 거룩함도 아닙니다. 거기에 기울이는 사랑만이 중요합니다.”

발에서 피가 나도 사랑으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었던 썬다 싱처럼, 폐가 다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육신의 질병에 신음하는 이웃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셨던 영적 스승님처럼, 손가락 발가락이 다 떨어져 나가는 순간에도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으로 돌보셨던 성 데미안처럼 사랑하다가 죽어가자. 남은 인생, 죽기까지 사랑하자. 끝까지 사랑하자.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닳아 없어질지라도 호흡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주님처럼 사랑하자. 끝까지!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