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자고 양떼를 버리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인정(人情)을 십자가에 못 박다

만주 집회 일정 때문에 하룻밤 자고 새벽에 길을 나섰다.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 했다. 아이들의 생활은 심각하고 비참했다.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배급받은 쌀로 반찬도 없이 저희들끼리 죽을 끓여 먹고 있었다. 구멍 난 양말에, 털모자 하나 없어 다 떨어진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냉방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이들이 대견했지만, 아비로서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만주 집회를 며칠 미룬다고 전보를 치고 아이들과 함께 묵으며 위로해주고 갈까? 아니지 하나님의 군사는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않는 법이지.’ 하는 생각에 한없이 번민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먼저였다.

아바지는 만주 집회일정 때문에 가 봐야갔다.” “오신 지 얼마나 됐다고 이리 속히 가십네까?” “기차 시간에 맞추려면 지금 가야 한다. 날래 들어가라우.” “아니야요, 기차역까지 아바지 마중하고 오갔습네다.”

길을 나서는 아버지를 배웅하려고 따라오는 아이들은 뒤축이 다 떨어져 맨살이 드러나 보이는 신을 신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법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향하는, 새끼 딸린 젖 나는 두 마리의 암소’(삼상6:10-12)를 생각하면서 인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주님! 저의 두 딸들을 주님의 품에 맡겨드립네다. 내래 주님의 군사가 되어 이 길을 가겠습네다.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라요.”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만주로 향했다.

 

고통과 맞서 싸우다

황주의 사리원교회 집회 요청이 왔다. 그곳에 가면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십자가 올 때 자원하여 지면 그 십자가가 너를 지고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지만, 십자가를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면 그곳에서 더 큰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이 떠올라 주저할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독교인을 특히 미워했던 호시라는 형사부장이 반 일본적인 설교를 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알몸으로 수감하였다. 차가운 유치장에 가둬놓고 온갖 모욕을 다 주었지만 그는 금식과 기도로써 참았다. 형사부장이 그 집회에 참석한 장로, 집사들도 모두 잡아 가두는 바람에 유치장은 비좁을 정도였다. 그런데 호시부장이 장티푸스로 고생하다 한 달 만에 죽고, 후임자로 온 부장형사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고, 5일 만에 경찰 서장도 죽었다. 더 놀라운 것은 검사마저도 건성늑막염에 걸려 기소도 못하고, 검사의 아내와 장모까지 병이 든 것이었다. 결국 수감 6개월 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됐다. 감격도 잠시 사회적 혼란 가운데 각 교회는 난장판이었다. 신자 비신자가 함께 섞여 정치활동을 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이러한 상황에 개탄하고 홀로 월남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서울신학교 학장으로 1년간 일을 한 후 나는 아무래도 부흥목사가 제격이라고 말하고 사임했다. 그러던 중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황해도 송파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 전신이 붓고 고열이 나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설교를 마치자 사람들은 민간요법까지 알려주며 걱정하였지만 목사님은 기도로 밤을 새웠다. 그랬더니 다음날 병은 깨끗이 치유됐다.

해남 부흥회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온 몸에 열이 나고 결리듯 쑤셔 옴을 느꼈다. 창백한 얼굴을 보며 집회를 쉬는 편이 낫겠다고 여러 사람이 만류를 하였지만 가볍게 뿌리쳤다. 밖에서 기다릴 수많은 심령을 외면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증상은 점점 심해져 창자가 끊어지는 듯했다. 급히 달려온 의사는 진찰을 해보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급성 맹장염인데, 24시간 내에 수술을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지라.” “집회를 중단해선 아이됩네다. 내래 집회가 무엇보다 중요합네다.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하갔시오. 내래 죽으면 하나님 손해지 내 손해겠소. 나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으니 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어이가 없다는 듯 의사는 혀를 내두르며 가버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밤새 이어졌다. 아픈 배를 움켜잡고 온 밤을 기도로 매달리다 잠들었다. 다음날 급성맹장이 수술도 받지 않고 깨끗이 치료됐다. “소자야, 소자야 안심하고 나를 보라.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시니 믿음에 굳게 서 나를 앙망하라.”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 주를 찬송했다.

 

참 목자의 흔적을 남기다

목포 압해도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나왔을 때, 19506.25전쟁이 발발하여 공산군은 이미 정읍까지 밀고 내려와 있었다. “모든 교역자들이 피난 갔으니 목사님도 피난가세요.” “예수님께서도 양떼를 버리지 않으셨는데, 내래 나 살자고 양떼를 버리고 떠날 수 없디.”

결국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과 모욕을 겪었지만, 도리어 그들에게 전도를 하였다. 또한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찬송을 부르자 옥문이 열린 것이 기억나서 찬송을 불렀다. “조용히 못하갔어? 종간나새끼래 죽은 줄 알았더니 뭐하는 게야?”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아닌 욕설이 퍼부어졌다.

3일 후 빨치산들이 반역자들을 숙청하기 위해 왔다. 제일 먼저 이 목사를 불러냈다. ‘, 이제 나도 순교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겠구나하고 기뻐했다. “예수 왜 믿소?” “당신들이 사회를 혁명하는 것처럼 내래 자신을 혁명하기 위해서 믿소.” “그래 예수 믿으며 천당은 보았소?” “천당 본점은 못 봤어도 지점은 내 마음속에 있디요. 경찰서나 지서를 보고 본서가 있는 것을 알고, 은행도 지점을 보고 본점이 있는 것을 알듯이 천국 지점이 있는 것이 확실하니 본점도 있는 것이 확실하디 않갔습네까?” 이 목사의 재치 있는 답변에 한바탕 웃으며 소란을 피우던 빨치산 대장은 이 목사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나는 전쟁 전 광주 의대생으로 어릴 적에 예수님을 믿던 사람입니다. 혹시 감옥 안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김치한 전도사의 이름을 대자 혼자 걷기는 힘드실 것 같으니 그 사람과 함께 될 수 있는 한 빨리 떠나십시오.”라고 했다. 그날 밤 다른 사람들은 빨치산의 손에 모두 죽고 말았다. 주님께서 친히 공산군의 마음을 감화하셔서 죽음에서 생명의 길로 옮기셨던 것이다.

 

며칠 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고, 공산군은 서둘러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수복된 서울로 올라온 이 목사는 큰 교회 목회를 뒤로하고 작은 산골교회와 나환자 교회, 고아원, 자매원, 양로원 등을 돌아보며 집회를 하였다. 1957년에는 희년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 순회 집회를 시행했다. 1959년에는 약 8개월 가량을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 교회와 일본인 교회와 현지 교회를 돌며 부흥회를 인도하여 많은 영혼들을 깨웠다. 당뇨병으로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후에도 전국을 돌며 480회의 일일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1965723일 성결교 합동 총회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라.”는 제목의 설교를 마지막으로 196582일 오전 1120, 6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리스도를 향한 불 같은 복음의 열정 위에 세워졌던 수많은 유럽 교회들이 문을 닫거나 술집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주한 청교도신앙의 토대 위에 세워진 미국의 교회들 역시 현저히 줄고 있다. 한국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양무리가 따를 본이 되는 목회자의 부재 탓이라 생각된다.

윤리적으로 정결하고 물질의 청빈을 추구하며, 명예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직 영혼 구령에만 열정을 쏟으시며, 강단에서 전파한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셨던 이성봉 목사님. 가정 형편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부흥회에서 받은 사례비를 시골교회 후배 목사님에게 드리고 빈손으로 집에 오신 것과 공주교회 유을희 전도사의 교회 개척 당시 건축비가 없을 때 평양에 있는 목사님의 사저를 팔아 건축 헌금으로 드린 일화는 참 목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삶으로 보여주었다. 병든 자신의 육신을 돌보기보다는 영혼 구령을 위해 한국 강토를 그리스도의 붉은 피로 물들이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 그 참 목자의 영성과 열정이 다시 한 번 한국 강토에 불어오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