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번영신학이 아니라 십자가 신앙이다
 만 원을 잃어버릴 때와, 반면 만 원을 주울 때 어느 쪽이 더 강한 심리적인 영향을 받을까. 잃어버린 쪽이 훨씬 심각하다는 이론이다. 세 아들이 재난 중에서 한 명이 죽었다면 두 아들이 살아있다 해도 죽은 한 아들로 인한 부모의 고통은 몇 천 배의 상실의 아픔이기에 살아있는 두 아들로도 고통을 메울 수 없다는 비애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소위 삼박자 축복을 열렬히 환영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번영신학의 열광으로 멋진 성취를 올렸다. 55년 전 1960년, $79이(GNP) 지금은 $27,125로 껑충 뛰어 세계 10대 경제부강을 자랑하는 부자가 되었다. 건강 역시 매년 좋아져서 80세가 평균 수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런데도 영혼만은 형편없이 추락하여 비통한 역사를 찍었다. 급성장한 한국 교회는 1,200만 기독교인이라고 기염을 토했는데 이제는 800만 까지도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린다. 교회 비리가 쉼 없이 펑펑 터지고 기독교인의 입지가 초라해졌다. 영혼은 후미진 곳에서 서러운 대접을 받는데도, 뱃심 좋게 떵떵거리고 살려는 심보인 것만 같다.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사22:13)의 막판 인생을 결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감히 천하보다 값진 생명을 가혹하게 학대했을까. 진짜 생명은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잠시 나그네 삶의 수단에 불과한 건강과 재물만 겨우 건졌으니 결국은 다 잃은 셈이다. 번성할수록 범죄하고(호4:10) 배부르니 교만했다(호13:6).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작아졌고,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기쁨은 줄어들었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적어졌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세계평화를 이야기하지만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다.”(중략, 반기문).
일찍 길어 올린 지혜로운 기도가 절실하게 그립다.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되지 않게 해주시고 하루치의 필요한 양식을 주시라는 읊조림이다(잠30:8). 복을 쏟아 부어주시라는 탐욕적인 기도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선언하셨다(눅6:20). 아브라함과 족장들이 부자로 살았던 모습을 하나님의 축복의 한 가닥이라고 본다면 선지자들이 가난과 무서운 핍박 받은 경우도 한결같은 시각으로 위대함으로 왜 보지 못했는가.
십자가 신앙은 버림이다. 참 생명을 잃게 될 위기에 놓인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다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야 영생을 얻는다고 재촉하셨다. 영혼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대책이었다. 부를 모은 것은 죄가 아닐 것이다. 단 누리라고 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세계선교의 도구로, 굶주린 인류를 위해 곳간을 열라는 사명 때문이다. 스스로 부자로 여기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칭찬은 한마디도 없었다. 책망과 회개의 메시지를 남기셨던 주님의 심정을 알라. 사랑의 기준이 내 몸처럼 이웃을, 이웃을 내 몸처럼 흥건히 적셔주는 사랑이라면 주저함 없이 반절씩 갈라야 한다. 교회는 선교와 구제로 과감히 재정의 50%를 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비곗살이 빠진다. 교회는 정화된다. 이것이 십자가 정신이다.
예수님은 버려진 나를 거두려 십자가 지셨는데 우리는 면류관부터 머리에 씌웠다. 주님은 산숙(山宿, 노숙, 눅 21:37) 하셨는데 우리는 넓디넓은 큰 집에서 살면서도 감사를 잃었다. 예수님은 전도하셨는데 우리는 몸의 건강이라는 명분으로 잔뜩 마시고 꼼꼼히 건강 챙겨 족하게 산다. 예수님은 생명 피를 쏟으면서 우리를 사랑하다가 죽임 당했는데 우리는 적당한 사랑만 바르고 다닌다. 진정한 십자가가 없구나. 참새도 마귀도 두려워 않는 허수아비 십자가인가보다. 오! 주님 우리를 살리소서!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