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에도 흔들리고 싶지 않다


볼륨을 낮추라

뜻하지 않게 청년집회 찬양리더를 맡게 되었다. 나에게 너무 맞지 않는 듯 한 옷. 시도 때도 없이 돌출하는 소심증과 염려가 발병했다. 리듬 감각도 매우 둔하고 박자도 잘 맞추지 못하는지라 속도가 빠른 새로운 곡을 소화해내고 적응 하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다른 할 일도 많은데 이 일까지 떠맡아서 괜한 마음고생을 하는가 싶어 심난했다. 몇 번이나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말도 못 하고 번민은 예정된 날짜가 다가올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집회 날짜가 되었다.

애써 태연한 척 찬양을 인도하는데, 계속 마음이 두 근 반 세근 반 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강사님이 많이 늦어질 것 같으니 찬양시간을 더 연장하라는 것이었다. 순간 목소리가 흔들리며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계획했던 시간을 훌쩍 뛰어넘자 점점 초조해지고 불안해졌다. 사람들의 표정도 냉랭해 보이고 찬양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마음에 조바심이 일고 너무 긴장을 하다 보니 멜로디도 잘 들리지 않았다. 멘트도 어색하고 찬양을 부르는 게 너무 힘겨웠다. 30분이 훨씬 지나자 마치라는 신호를 보내주셨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자리에 돌아와 앉는데, 온 몸에 힘이 쫙 빠져 나가는 듯했다.

강의가 시작되고 “티보잉” 영상을 보여주시는데 지난번에 보았던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명예도 아닌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찼던 한 청년의 순수한 열정 앞에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순간 마음속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왜 사람을 그토록 의식하느냐? 스스로 소심함과 두려움 때문이라고 핑계대지만, 그것은 껍질에 불과한 것이다. 그 껍질 안에 네 욕망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냐? 네 목소리의 볼륨을 아무리 높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금송아지 앞에서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느냐? 네 마음 안의 볼륨을 낮춰라. 그러면 네 욕망의 소리가 아닌 나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숨을 죽이며 눈물을 훔쳤다. 육신의 힘이 빠져나가고 불신과 교만의 탑이 스르르 무너진 뒤에서야 비로소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예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두려움과 불신과 교만의 벽으로 마음의 볼륨을 너무 높여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반응에만 민감했던 이 어리석은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헛된 명예욕과 자랑에 눈이 멀고, 귀가 멀었습니다. 저를 홀로 두지 마시옵고 가난한 마음을 주옵소서. 저의 볼륨을 낮추고 눈의 침묵, 귀의 침묵, 혀의 침묵, 마음의 침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긍휼을 베푸사 저의 찬양 가운데 임재하여 주옵소서.”

이후 저녁 찬양 인도 때는 비교적 마음이 편안했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뻤다. 하늘까지 높여 놓은 볼륨을 낮추자 비로소 하늘의 멜로디가 들려오는 듯했다. 오선지의 음표들이 마치 하나님 앞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듯했다. 순간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였던 선한 일꾼들이 스쳐 지나갔다.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인도 캘커타의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였던 마더 테레사는 “어떤 일을 하든 주님의 영광과 모든 이들의 행복을 위해 하세요.”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미련한 곰탱이는 여전히 사람의 환호와 칭찬에 웃고, 사람의 비웃음과 야유에 울고, 일의 성과에 따라 행복해 할 때가 참 많다.

인도의 고급 공무원이며 힌두교도였던 나빈 치울라가 쓴 『마더 테레사』 전기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실려 있다. 어느 날 그녀는 테레사에게 “폭동이 있으면 그런 장소로 가기가 두렵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죠?”라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머뭇거리며 다시 겸연쩍은 듯 묻자, 테레사는 “주님께 가는 것을 두려워합니까?”라면서 엷은 미소로 답하였다. “혹은 다른 자매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를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야 합니다. 선교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받은 소명은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는 일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일 수 없다. 자신의 헛된 명예욕에 갇혀 사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주님의 선하신 일에 쓰임 받는 한낱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순간순간 올라오는 욕심을 떨쳐버리고 주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두려움도 불안도 사라지고 그곳에 진정한 마음의 평화가 깃들 것이다.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추고 내 안의 볼륨을 낮추자. 이는 마음의 침묵 속에서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려고 하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이 죄인은 자신이 무엇이나 된 양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려 하고, 은혜를 끼치려고 하는 오류에 빠질 때가 많다.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스스로 비천에 처할 수 있었던 세례 요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일컫는 그를 정작 자신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일 뿐이라고 하였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3:29).

나의 기쁨과 행복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성녀 테레사의 고백처럼 하나님을 소유한 이에게는 그 무엇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그 어떤 세상 유혹과 욕망에도 흔들리지 않고 놀라지 않는다.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아무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게 합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이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오로지 하나님으로 충분합니다.”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거나 영향 받지 않고 오롯하게 주님만을 바라보는 행복을 매 순간 경험하고 싶다. 내 안에 가득한 걱정과 불안 염려의 소음들, 간혹 사람들이 들려주는 갖가지 소음들, 그 모든 것들의 볼륨을 다 내려놓자. 아니 꺼버리자. 주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놓칠까, 그것에만 조바심을 내며 간절히 귀 기울이는 착한 아이와도 같은 신앙인이 되자. 충분합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수 백 번, 수 만 번 고백하고 소리 높여도 부족하니 외치고 또 외치며 나아가자.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