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태워야 하리

이제 날이 좀 풀리는가. 벌써 눈은 가지 속의 봄을 본다. 여전히 바람은 차고 양동이엔 얼음이 갇혀 있다. 선교 여독이 뒷목과 머리를 짓누른다. 이런 날 전지된 가지들과 낙엽을 모아 태우는 일은 맛스러운 망중한이다. 구수한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면, 고양이 형제들은 따스한 불보다 주인의 무릎이 더 그리워 주변을 맴돈다.

다 태워야 한다. 선교의 성공적 성과도, 부끄러운 실패도 다 태워버려야 한다. 자기 연민으로 인한 쓸쓸함이나 성취의 감격도 다 타버려야 한다. 그리곤 남는 것은 오직 하나, 주님의 영광만 남아야 된다. 선교는 전적인 주님의 계획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잠시 참여케 된 일로 내가 높아져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사용해주심에 감사할 뿐이다. 주님은 70인의 제자들이 병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는 성공적 선교를 마치고 돌아와 흥분할 때, 흐뭇해 하시면서도 짧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0:20) 훈련이 더해가며 제자들이 더 성장할 때에 주님은 또 다시 권고하셨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7:10).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높아지기 쉬운 존재들인지, 교만성이 뿌리박혀 있는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유혹과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는지 잘 아셨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 하셨고, “누구든지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 너희가 먼저 서로 발을 닦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종종 높아진 우리가 철저하게 낮아질 기회를 베푸신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태워질 시간을 주시는 것이다.

당대의 의인 욥은 그 의로움에서 낮아질 시간이 필요했다. 끔찍한 고난은 높아진 영혼을 태우고 정제했다. 승승장구하던 다윗은 왕궁 지붕에서 내려다보다 밧세바를 범하곤 아들도 잃고 나라도 잃었다. 심지어 바벨론 왕궁 위에서 자신이 이룬 성취에 높아졌던 느부갓네살 왕을 7년 동안이나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게 하며 진정으로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까지 광야에 두셨다. 훗날 이들이 다시 복권하게 될 때는 진실한 깨달음과 겸손한 고백 후였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4:37).

고통은 우리를 제련한다. 교만을 태우고 아집을 부순다. 실패가 꼭 필요하다. 창피스러운 일들이 자주 일어나야 안전하다. 얼굴이 화끈거려야 그리스도의 심장을 얻는다. 스승의 표현으로는 날벼락을 맞아야깨어진다.

성공적인 선교 후에 교회로 돌아오는 이는 패잔병처럼 들어와야 한다. 스스로 높아진 자기를 무슨 일로든 태우고 들어와야 주님이 영광 받으신다. 정 태우기 어렵다면 겸손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을 태운 나귀새끼가 되어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 군중의 환호에 착각해선 안 된다. 그건 내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니까.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