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쳐다보아 주십시오

한 모임에서 서로의 기도제목을 나누던 중 영성생활의 지루함을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를 요청했다. 단순하고 반복되는 생활로 인해 늘어진 마음을 어떻게 조일 수 있을까 갈등하는 요즘이었다. 옆에 있던 분도 비슷한 기도제목을 내놓았다. 자극적이고 변화가 많은 세상의 문화를 경험한 세대가 겪는 고충이라며 다들 이해해주는 분위기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게으른 내 삶에 대한 정당함이 증명된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조금 뒤 한 분의 기도제목은 차원이 달랐다. 그분의 기도제목이 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여기 저기 돌아보아도 기도가 필요한 곳뿐입니다.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세상을 보고 애통한 마음으로 기도했던 것처럼,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중보 기도자가 되게 해주세요.”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이었다. 왜 우리의 기도는 늘 문제해결과 소원성취에서 떠나기 어려운 것일까. 기도의 대상도 늘 가족이나 친구들 같은 애정으로 묶인 사람들일 때가 많다. 아무리 다급하고 중대한 소식을 들어도 기도의 자리까지 갖고 가긴 쉽지 않다. 당장 나의 만족을 지연시키고 있는 그 문제는 늘 부동의 1순위인데 말이다. 이렇게 이기적인 나의 기도가 바뀔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인 것 같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내게 와 닿는 것 뿐 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눈빛과 마주할 때, 메마른 눈에도 눈물이 맺히게 된다. 그 불타는 마음이 우리에게 부딪힐 때, 차가운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기도의 유일한 동기는 하나님의 심정이어야 한다.

이사야는 보좌에 앉아계신 주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6:8) 하시는 탄식에는 주님의 애타는 눈빛이 서려있었다. 그 눈빛과 마주한 이상 순종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6:8) 하며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주님과 마주친 자의 삶은 그러한 법이다.

다니엘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한 것을 알고도 하루 세 번 기도의 자리를 지켰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을 향한 창을 연 그의 마음에는 잃어버린 조국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다. 포로로 끌려가서 총리가 되는 어마어마한 성공의 길에 올랐음에도, 그의 마음에는 변함없이 하나님의 눈물이 있었다. 기도의 자리에 앉을 때마다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그치지 않았음을 확인했기에 어떤 위협에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버린 사람에게 기도의 자리는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구역인 것이다.

왜 나는 같은 죄에 계속 넘어질까. 말씀과 기도로만 채워진 삶이 지루하게 느껴질까. 영혼 구원을 향한 열정이 부족하고, 영적 성장이 이토록 더딜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23:28)하신 주님의 마음과 너무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슬픔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과 마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해야겠다는 결심은 수없이 했지만 나를 기도케 할 수는 없었다. 내 연약한 무릎이 꿇려질 때까지, 바실레아 슐링크처럼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나의 주님, 그 슬픈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아 주십시오. , 그때 베드로를 바라보셨던 것처럼 저를 쳐다보아 주십시오. 주의 그 슬픈 눈빛이 제게 통회의 눈물을 주시고, 당신을 위한 고난도 기꺼이 받을 수 있도록, 저를 그 눈빛으로 쳐다봐 주십시오. 그때 베드로처럼, 저 역시 애통해 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그리고 주를 사랑하며 핍박의 때에 주를 슬프게 해 드리지 않도록 아, 저를 그 슬픈 눈빛으로 쳐다봐 주십시오.”

예수님을 부인 한 뒤 베드로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단순한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연약함을 미리 아시고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일러주시며 측은히 자신을 보셨던 주님의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예수님의 공생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도행전의 담대한 사도의 모습도 힘도 거기서 나왔을 것이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자신을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로 바라보시며 격려하시던 그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금 충성과 순종을 맹세하지 않았을까.

내 힘으로 하는 회개는 후회와 뉘우침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사랑과 비통에 찬 주님의 눈빛만이 나를 고치실 수 있다. 내 문제에 갇혀 어린아이 같이 배부른 투정을 부리고 있는 나를 가르칠 수 있는 것도 그것뿐이다.

주님, 저를 쳐다보아 주소서. 십자가상에서 죄인들을 보시며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던 그 눈으로 저를 쳐다봐 주소서. 주님의 그 눈빛과 마주하여 메말랐던 제 눈에 참회와 통회의 눈물이 그치지 않게 하소서. 또한 그 눈으로 저도 세상을 바라보며 중보의 기도를 드리게 하소서.”

박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