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순수를 잃어버릴까

학창시절, 거리 한 귀퉁이에서 들려온 소녀의 기도를 듣기 위해 호호 손을 불어가며 곡이 끝날 때까지 언 발을 구르던 그런 순수함은 어른이 되면서 굳은살이 박이는 손가락으로 무뎌졌다. 살며시 핀 보라색 나팔꽃을 보며 드문 색이라고 쓰다듬던 떨림도 무심해지고, 짙은 노을이나 청명한 하늘을 보며 왠지 자신이 더러운 것 같아, 가졌던 죄송한 마음도 사라져버렸다.

앳되고 맑은 소녀의 얼굴에서 음욕을 느낀다면, 햇빛이 만든 복숭아의 신비로운 빛깔이 식욕만을 일으킨다면, 맑은 냇물을 가르며 오르는 힘찬 물고기가 몸보신을 생각케 한다면, 순수는 이미 그를 떠난 것이다.

하나님 창조물들의 신비와 순수를 잃은 이들은 느낄 수 없다. 정욕에 단련된 마음들로는 결코 완전하신 조물주의 경륜을 맛볼 순 없다. 순수를 잃은 이들을 향한 정죄의 돌을 들은 이들도 이는 매 한가지이다. 모두가 병이 든 까닭이다.

이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돈도, 명예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장소와 대상만 바꿨을 뿐이다. 잠시 다른 것을 통해 위로받고자 함이요, 새로운 대상에 몰두함으로 중병을 잊고자 함이다.

치료는 병인식에서 시작된다. 순수를 잃은 중환자임을 인정하는 것은 수술실의 문을 여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치료는 오직 치료자 예수님의 광선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모든 것을 놓으며 겸손히 누울 때 하나님의 수술은 진행된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4:2).

이는 인격과 말씀에서 비춰진 예수님의 거룩한 빛이 그 중병을 치료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돈만 벌던 마태의 병을 치료하시고, 음란 중독에 걸렸던 마리아의 중병을 치료하시고, 오만했던 베드로의 실패와 죄책감을 치료하셨다. 이 빛에 주목하지 않았던 명예욕과 물욕의 중증 환자 가룟 유다는 결코 치료받을 수 없어 그대로 지옥으로 떨어졌다.

순수는 천국을 오르는 천사의 날개와 같다. 그것이 없이는 하나님께로 날아오를 수 없다. 순수한 지향을 잃음은 땅의 정욕에 이미 매임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사랑을 잃은 까닭이다. 그 사랑에 지루해져 버린 까닭이다. 처음 사랑을 간직하지 못한 불결이다. 우리 주님이 나같이 더럽고 더러운 죄인을 위해 죽어주신 그 뜨거운 사랑을 잊어버렸기에 더러운 음녀의 유혹이 달콤해지고, 정욕적인 설렘으로 그 집 문을 두드린다. 주님의 그 순결한 사랑을, 피 흘리기까지 사랑한 그 순전한 사랑을 짓밟는다.

, 우리가 이 음란한 시대에 살 길은 오직 순결한 사랑으로 죽어주신 그 주님의 빛에 있다. 그 빛이 불순을 치료한다. 순수를 잃은 중독을 치료한다. 처음사랑을 찾아 울자. ‘왜 제가 이리 되었나요, 제가 왜 이렇게 죽을 병에 걸렸나요, 저를 치료하소서! 나의 주님!’ 울먹이며 흐느끼자. 가슴을 찢으며 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