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

너무 크게 들리는 침묵

종교영화 사일런스(Silence, 침묵)는 제목대로 침묵에 관한 영화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온갖 조롱과 핍박, 고문을 당하던 일본 성도들의 순교적 신앙이야기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로드리게스 신부의 고뇌와 갈등을 담고 있다. 일본인 성도들의 고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목이 잘리고, 화형을 당하며 짐승처럼 숨어 지내며 예배를 드린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보이는 곳에서 자신을 죽여야 했고, 고통을 당해야 했으며, 사람답지 않게 살아야 했다. 그래도 믿음을 져버리지 않으려 몸부림을 쳤고, 분명 신앙적인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두렵고 불안하고 나약한 인정에 흔들리기도 한다. 거기에 더해진 최고의 고통은,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으시다. 예수님을 믿는 일본인들을 살리려면 로드리게스 신부는 자신의 신앙을 포기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생명 사이에서 고민하는 로드리게스의 갈등과 아픔은 극에 달해 고뇌한다.

결국 오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를 결심할 찰나, 그토록 기다리던 예수님의 음성이 들린다. ‘나를 밟거라! 난 괜찮다. 이해한다. 나는 지금도 너와 함께 한다.’ 침묵의 시간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주인공은 배교의 자리로 조금은 괴로워하면서도 주님의 응답이라 생각하며 타협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안일하게, 일상에 타협하며 누구나의 삶을 평범하게 공유하며 일생을 산다. 내면의 작은 번민을 일생 억누르고 살다가 결국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의 시체 사이에 크리스천임을 상징하는 작은 십자가가 놓여졌지만, 그것으로 주님을 배교한 것에 대한 면죄부를 줄 수는 없었다. 성경 말씀에 근거한 판단을 해보면, 그 모든 순간들은 하나님께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들이었다. 하나님의 침묵은, 죽기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환경과 현실 앞에 순종하고 인내하라는 거룩한 응원이 아니었을까.

 

침묵의 고통스러움

욥은 자신이 극한 고통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며 영육간의 고통에 관해 탄식한다. 욥은 생명이 촛농처럼 녹아내리고, 하나님마저 자신을 티끌처럼 내던지고, 재앙과 흑암 속에 짐승이 되어가는 듯 한 처참함. “밤이 되면 뼈가 쑤시고 나의 아픔이 쉬지 아니하니라는 고통의 표현이 있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어도, 주님께서는 내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주님께 기도해도, 주님께서는 들은 체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 재산이 없어지고, 아내가 떠나고, 자녀들마저 죽는 처참함 속이었지만 그 중 최고의 고통은 하나님의 부재였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절규하며 영육간의 고통을 탄식하고 있다. 헨리 나우엔은 이런 상황을 부재의 사역이라고 표현 했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목마름또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윗은 시편10:1-2절에서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서시며 어찌하여 환란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편22:1절에서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멀리하여 나를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 하시나이까라고 표현했고, 시편 곳곳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원죄를 가진 날로부터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자그마한 일에도 성질을 내며 불화하고, 나보다 잘나거나 잘 되는 사람들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죽이기도 한다. 음란하고, 게으르며 태만하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많고 육신의 애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많다. 세상을 기웃거리고, 육신의 것을 탐하며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에 집착한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조금만 숨으시면 울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가 된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채워주지 않는 것 같고, 만족스럽지 않으면 불안하고 두렵고, 오래 참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침묵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일이 잘 되지 않아도 결국은 주님이 다스리실진대, 우리에겐 실낱처럼 믿음이 가늘고 약해서 보여지는 것이 전부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삶은 무가치하다. 주님 손을 떠나면 그저 마른 막대기요 한낱 들풀과도 같다. 주님이 주신 생명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사랑을 입어 의와 진리와 빛으로 거룩함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것은 온 우주 만물 중 누구도 갖지 못한 거룩한 은총이다. 두려움의 정의를 담대함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침묵을 두려움이 아닌 거룩한 인내로 바꾸어야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지 않을까.

새롭게 쓰는 침묵

하나님이 없는 것 같고, 도와주시지도 않는 것 같은 감정으로 느끼는 것에 우리가 익숙해져 있다. 애굽의 고기 따위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섭리를 비교하며 불평을 해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벼움은, 40년의 연단을 통해 갈고 닦여지고 새롭게 되었다. 아직도 바뀌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너희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함과 완전함의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외침이 거룩한 절실함으로 우리의 심령을 울리고 있다. 속물근성이 가득한 내 모습을 어떻게 거룩하고 완전하게 바꿀 수 있을까? 세상의 소리에 반응하고, 내 꾀에 귀 기울이고, 작은 파도소리에도 두려워하고, 내 자리가 위협 당할까 두리번거리는 귀와 눈은 헛된 희망을 붙잡고 사는 어리석은 이다. 아직도 여전히 그 자리다. 세상에 나와 주님만 있다고 생각해 보라. 누구의 소리를 듣겠는가. 주님이 침묵하셔도 주님뿐이니 기다리고 인내할 것이다. 들리는 것이 너무 많은 나의 귀를 막고 주님과 나만의 공간으로 숨어 들어가야 한다.

상황이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더욱더 행복한 결론을 기대할 수 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은, 연단은 소망을 주어 우리를 거룩한 사랑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심에 인내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며 그 의심을 믿음으로 바꿔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면하는 모든 인간들은 원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출발했건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주님이 뭐라도 말씀해 주시길 원하는 일차원적인 신앙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출발한 신앙인들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뭐라도 말씀하시라고 하나님을 귀찮게 하고 졸라대고 떼를 쓰며 우는 어린아이가 될까. 이유는 단순하다.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을 인내하기 싫다는 뜻이다.

성숙의 시간을 견뎌야 연단 받은 정결한 정금이 만들어지는 법이다. 우리의 힘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왜 빨리 답하지 않느냐,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하나님이 밉다, 나쁜 하나님이요 고약한 심술쟁이로 주님을 아프게 하지 않길 소원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를 향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미래는 영원한 형벌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영원한 생명을 부여 받고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벅찬 감격으로 달려갈 일이 아닌가. 무엇이 들리는가, 무엇을 듣길 원하는가. 다 막고, 주님의 음성만 듣자. 침묵으로 말씀하셔도 오래 주님 앞에 앉아 있으면 주님의 뜻이 보이고, 결국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할 것이다.

빠삐용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빠삐용이 감옥에 갇혀 하나님을 원망했다. ‘나는 이 감옥에 들어올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왜 나를 이곳에 가두십니까?’ 호소할 때 공중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너의 죄는 네 인생을 허비한 것이다.” 인생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때가 악하니 주님의 시간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 그날에 슬피 울며 이를 갈지 않기를, 그날에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하면서 소리 없이 다가오는 주님의 날을 기다리고 대망할 순간들이다. 천국을 향하는 순례자들이여, 모든 소음에 귀를 닫고, 침묵 속에 말씀하시는 주님만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