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감옥아! 내게 찾아와줘서

물왕 저수지로 내려가는 길목엔 봄의 싱그러움과 화사함으로 마음이 가득하다. 냉이, 민들레, 씀바귀, 별꽃, 유채꽃, 개나리, 살구꽃, 이름 모를 들풀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 때문이다. 만발한 벚꽃 가로수 밑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하지 않다. 바람이 불자 하얀 꽃잎들이 손등으로, 어깨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벚꽃의 꽃말은 결박’, ‘정신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눈꽃나무를 연상케 하는 벚꽃의 꽃말이 다소 이색적으로 다가왔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겉모양이 아닌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지녀야 함을, 또한 그러한 아름다움을 지니기 위해서는 내가 원치 않는 수많은 결박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한다.

요즘 내 안에서 주님, 선교라도 떠날까요?’라는 치기어린 반항이 꿈틀거린다. 남들은 목숨 걸고 하는 선교를 선교라도 라니. 그러면서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말씀이 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1:12-13).

주님께서 흩날리는 벚꽃의 하얀 꽃잎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듯했다. ‘나도 안다. 힘들지? 그러나 자유롭지 못하고 부대끼고, 무겁게 짓누르고 결박당한 것 같은 그 길이 너를 위해 준비해 놓은 선물이요 은총이란다. 다시 힘을 내서 나와 함께 걷자꾸나.’ 나의 기대가 무너지고, 관계나 사역에 대한 부담감과 어려움이 닥치면 주위의 모든 환경들이 나를 결박하듯이 옥죄어 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결박이나 구속처럼 느껴지는 환경을 뛰어넘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오기를 원하신다.

러시아의 양심으로 불리는 소설가 솔제니친은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이렇게 말했다.

젊은 시절에 나는 성공의 달콤함에 취해 스스로 오류가 없는 존재라는 착각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잔인했다. 권력에 잔뜩 취한 나는 살인자요 압제자였다. 가장 악했던 순간에도 나는 스스로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고 체계적인 논리로 잘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수용소에서 썩어가는 지푸라기 위에 누워서야 비로소 내면에서 처음으로 선한 충동을 느꼈다.

선과 악을 가르는 경계선은 국가와 국가 사이, 계급과 계급 사이, 정당과 정당 사이를 관통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마음, 그리고 모든 인간의 마음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히 깨달아졌다. 내가 수용소 시절을 회상하며 고맙다, 감옥아!’라는 말로 때때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오랜 시간 복역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영혼을 살찌웠다. 그래서 나는 망설임 없이 말한다. ‘고맙다, 감옥아. 내 삶 속에 찾아와줘서.’”

결박당한 것 같은 환경이나 사역들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큰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지난 일을 돌아보아도 원치 않는 수많은 매임과 구속처럼 느껴지는 일들, 사람이나 환경들이 나의 영혼을 살찌우고 단련시키는 은혜의 울타리임을 깨닫는다. 매임으로 인해 오는 고통과 아픔들이 있지만, 그 번뇌의 시간들이 영혼의 자양분이 되었다. 실패하고 쓰러지고, 깨어지고, 비참함과 비굴함을 맛보는 매임의 현장들이 없었다면 결코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수많은 매임 속에서 나의 기대나 자존심을 산산이 무너뜨리시고 그 안에서 상황이 아닌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문제의 해결보다 결박당함 속에서 정신적 내면의 아름다움을 일구어 가셨다.

편안함을 갈구하는 나의 욕심을 갈아엎으시고, 성취와 성공이라는 우상단지도 내려놓게 하시고, 구속받기 싫어하는 내면의 깊은 자아도 깨뜨리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 바람이 아닌 하나님의 바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의 기도로 바꾸어 가신다. 스스로 띠 띠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밭을 갈려는 나의 황소고집도 꺾으시고 순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탈바꿈시켜 가신다.

결박이나 매임을 당하는 것 같은 삶의 현장이나 사역이나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시기 위해 마련해 놓은 광야 훈련장이다. 나의 매임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또 다른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복음의 진보를 이루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값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1:14).

조금만 매임 당하는 것 같으면 답답하다고 소리치며, 누군가에게 조금만 간섭을 받아도 힘들어하며 벗어나려고 할 때도 많다. 그러나 매임 안에서 자유를 누릴 때 우리의 영혼은 더 성숙해질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기 위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고 고백하였다. 날마다 주님께 매인바 되어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고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셨다.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 살아갈 때,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낮아질 수 있다. 낮아짐은 사람들로부터 오는 매임, 환경에서 오는 매임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땅에서 편하고자 하는 마음을 배제해야 한다. 불편함을 순간순간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크고 작은 매임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설 수 있다.

독일 나치에 의해 암티츠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어느 신앙인의 말이다. “우리들은 커다란 고행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당하는 매임은 모두다 우리 영혼을 위한 주님의 안배이십니다. 이것을 잘 이용하도록 하십시오. 고통은 이것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좋은 것, 즐거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십자가를 받으십시오. 모든 이웃 사람들을, 친구든 원수든 조금도 예외를 두지 말고 끊임없이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결과는 원인과 닮는 법이므로 모든 피조물도 사랑으로 살아 있습니다. 사랑은 궁극적 목적을 위해서만 아니라 중간 목적을 위해서도, 또 건전하고 정상적인 모든 활동을 위해서도 중요한 동기가 되며 첫째가는 힘이 되는 법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당하는 결박은 사랑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내 이웃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기간이다. 결코 나의 기대나 편안함과 안락과, 성취나 성공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다. 매임 속에서 부대껴도, 눌려도, 아파도, 수많은 가시가 찔러대도 끝까지 이 길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하며, 인내하며, 희생하며, 포용하며, 섬기며 겸손히 나가야 한다. “환난과 결박이 기다릴지라도 나의 달려갈 길과 예수님께 받은 사명,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겠다.”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귓가에 강한 울림으로 들려온다. 다시 어그러진 무릎을 굳게 세우고 주님께 매인 바 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전진하자. 주님을 만나는 그날 고맙다 감옥아, 내게 찾아와줘서.”라고 감격하며 고백할 수 있으리라.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의 감옥에서 주님과 나만의 감사제를 드린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