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의 노선 & 어린양의 노선

사자와 어린양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누가 뭐래도 이것은 우문이지만 인류역사와 우리의 경험으로 비춰볼 때 단순한 질문은 아니다. 분명 힘이 지배하고 있는 중에도 정의가 이긴다든지, 진실은 승리한다든지 하는 소리를 흔히 듣는다. 그때마다 우리의 반응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렇지 않던데 하면서 코웃음을 칠 수도, 또 뜻은 좋으나 너무 이상적이라거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소리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우리의 역사적 지배 가운데 나타난 모든 제국은 독수리와 사자 같은 맹수를 상징하며 자기들의 힘을 과시한다. 각 제국이 힘을 상징하는 동물로 마스코트를 사용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각 나라 동물의 상징은 독수리(미국), 사자(영국), 표범(프랑스), 늑대(독일), 불곰(러시아), 숫멧돼지(중국), (이스라엘) 등이다. 물론 군주와 왕정이 바뀌면서 국가상징 동물은 자주 바뀐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어느 동물을 상징적으로 사용하면 더욱더 힘 있는 제국으로 나타낼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결코 연약한 동물을 상징으로 내세우는 법은 없다.

생각해 보라.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배경을 딛고 생존한 기독교의 상징이 어린양인데, 로마 제국의 상징인 독수리와 게임이 되겠는가? 그것도 쌍 독수리의 문양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황제에게 어린양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그러한 힘의 과시 속에 움튼 기독교가 그 힘을 동경하고 세상 나라처럼 힘을 행사하는 게 교회사의 주류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교회가 세속화되었는가를 나타내는 반증이다. 사람들은 독수리와 어린양 사이의 너무나 뻔한 게임에 너나 할 것 없이 사자나 독수리 편에 줄을 선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어린양 나라 이야기가 나왔고, 또 세상 끝 날까지 전개될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모든 세계는 크게 사자의 세계와 어린양의 세계로 나뉜다. 하나는 넓고 찾는 사람이 많고, 하나는 좁고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다.

세상에 어린양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제국은 세상에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가 유일하다. 그것도 살아있는 어린양이 아니라 죽임당한 어린양으로 등장한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세상 나라의 상징인 사자나 표범 같은 맹수들은 모두 남의 피를 흘려서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성질이 공통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의 상징인 어린양은 자기 피를 흘려 남을 살리는 제물이 되는 것이 그 특성이다. 성경의 어디에도 사자 같은 맹수로 제물을 삼는 사건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흠 없는 어린양을 제물로 삼았다. 참으로 흥미로운 대비이다.

겉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통한 평화(pax), ‘팍스 로마나를 내걸고, 일본의 침략야욕의 구실로 대동아 공영을 외쳤지만, 제국이 내세운 평화는 힘과 군사력의 우위를 선점한 강요된 평화였다. 사자의 평화는 우승열패(優勝劣敗)와 강자독식을 합리적 인간사로 몰고 가는 도적이며 강도였다. 그것은 자기가 죽어 남을 살리는 제물과는 다르다.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린양이신 예수가 온 것은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려 한다는 선언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10:10)

세상의 통치자들은 힘을 가지고 지배한다. 군사력이든, 경제력이든, 문화적인 우월이든 피지배자보다 더 우의를 선점해서 나온 결과이다. 그래서 세상은 너도나도 힘을 기르려고 혈안이다. 힘이 있어야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강자가 지배하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원리가 판을 친다. 이런 힘의 지배는 대다수를 피눈물 나게 한다. 기회만 되면 또 다른 전쟁과 폭력의 악순환을 부른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잃어버린 인간의 통치는 동물의 세계다. 힘이 그 통치의 구심점이다. 세상 나라의 유지와 확장의 지렛대는 힘이다. 이것을 다니엘은 짐승의 세계라고도 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흑암의 세력에 대항하여 어떻게 반격을 가하는 방식은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다. 흔히 인간사에서 군사력, 경제력 같은 것들을 수단으로 힘이 행사된다. 종교 세계에서도 포장만 다를 뿐, 그 힘의 근원적인 지렛대는 동일하다. 예컨대 중세의 기독교는 힘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기독교화 하였다. 성지탈환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십자군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다.

그 대가로 하나님 나라는 임하였는가? 기독교 제국(Christendom)나라가 임하옵시며(Thy Kingdom come)”의 기도 응답은 될 수 없다. 힘으로 제국은 건설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이 그렇게 갈망하는 나라(Kingdom)는 아니었다. 하나님의 품성의 지배력이 아닌 무력으로 수많은 정복의 역사를 가져왔다. 십자군의 정복과 약탈행위는 기독교 역사의 치욕이었고, 하나님 나라의 어떠함을 그릇되게 각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독교가 힘으로 그 나라를 세우려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있다. 명분이 종교적일 뿐 그 권력의 힘은 세상의 방법과 같았다. 기독교의 역사가 이런 동물의 세계를 본받아 그 세력을 확장해 왔다.

심지어 그 힘의 세력을 선교라고 믿기까지 했다. 아프리카에 점령군처럼 온 서구 선교사들이 기도하자 해놓고 다 같이 눈을 감는 동안 온갖 자원을 싹쓸이해갔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중남미에서 벌어진 서구 열강들의 선교각축전(角逐戰), 개신교의 북미주 점령도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 모든 선교는 힘의 우의를 선점하여 정복, 군림, 지배의 발톱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이 과정에서 남의 피를 흘려 내 것으로 삼는 사자의 원리가 판을 쳤다. 제국주의적 선교는 포악과 광포가 가득한 역사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사자나 독수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은 어린양에 의해서 그 나라는 이루어진다. 즉 힘으로 정복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에 의해서 그 성분이 분배되고 확산하는 것이 나라가 임하옵시며의 과정이다. 그 어린양의 생명은 천하무적의 군대를 가진 로마까지 점령했고, 야만족이라고 불렀던 유럽의 여러 부족을 복음화시켰다.

제왕의 모습으로 나타난 군왕이 아니라, 어린양의 모습을 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는 퍼진다. 세계의 이목이 쏠린 로마의 중심부가 아닌 후미진 팔레스틴의 베들레헴에서 한 무명의 아들로 태어난 저 나사렛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인간의 상식과는 어긋난다. 여전히 우리는 제국의 힘(예수 외에 모든 것)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하고 싶은 욕망을 품고 산다. 다만 욕망이 종교적인 동굴(Cocoon) 속에 웅크리고 있어 쉽게 눈에 뜨이지 않을 뿐이다.

여기 통치 원리가 분명하다. 사자의 노선이냐, 어린양의 노선이냐? 전자는 지배가 목적이고 후자는 살리는 게 그 목적이다. 따라서 하나는 멸망으로 치닫고, 하나는 생명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세상에 없는 복음의 비밀이다. (계속)

김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