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싸라기를 모으고 또 모으고


얼마 전, 그다지 많지도 않은 주일학교 아이들 중 예뻐하던 몇몇의 아이가 다른 교회로 가게 되자, 움푹 들어간 고무공 마냥 마음 한쪽이 위축되었다. 지금까지의 게으름과 타성에 젖은 모습을 반성도 해보고 다시 열심을 내고자 하였지만, 여전히 마음에는 시커먼 먹구름이 끼였다. 몇 번이나 떨쳐보려고 했지만 자꾸만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었다. 내려놓아야 하는데 하면서도 여전히 다시 염려와 근심의 보따리를 움켜쥐었다. 하나님의 평가기준보다는 눈에 보여 지는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을 쓰는 나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말로는 부흥보다도 숫자보다도 순간순간 진리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갈지자를 그으며 이리 저리 비틀 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명예욕과 자기애를 살짝 가린 채 허례와 위선의 가면을 쓰고 겉으로는 태연한척 하였다.

아무리 사람들 앞에서 그럴싸하게 가린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나지 않을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여전히 아이들의 숫자에 웃고 우는 나는 영적 어린아이요, 삯군임에 틀림이 없다. 언제쯤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헛된 명예욕을 좇지 않을 수 있을까?

부스러기의 은혜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두려워하는 못난 나에게 귀감을 주는 한 여인을 다시 보게 되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어떤 여자가 얼른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었다. 그녀에게는 더러운 귀신이 들린 딸이 있었다. 그리스 사람으로, 수로보니게 사람 이방 여인이었다. 그녀는 예수님께 자기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자녀들을(이스라엘 민족) 먼저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빼앗아서 개에게(이방인)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여인은 수치심으로 인해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여전히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주님, 옳습니다. 그러나 상아래 있는 개들도 그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떠났다.”

우리는 사람들의 좋지 않은 평가나 수치나 모욕을 받으면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거나 또는 굴욕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서서 낙심하거나 주저앉아 버릴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악평이나 모욕이나 수치를 달게 여기지 않으면 결코 영적 성장을 이룰 수가 없다. 수많은 환경과 조건 속에서 능욕이나 수치나 천대를 겪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단단한 자아가 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일의 성과가 좋을 때보다는, 일의 성과도 좋지 않고 악평과 훼방, 실패도 겪으면서 사람들로부터 무시도 당하고, 수치심도 느낄 때 비로소 자신 안에 깊이 숨겨져 있는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자아가 깨어져 나갈 때마다 아파하고 씨름하며 심한 마음고생도 하지만 높아졌던 마음이 낮아질 대로 낮아져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가리이까. 모든 것이 제 탓이오니 불쌍한 이 죄인을 받아주소서.”라면서 납작 엎드려 두 손을 번쩍 든다.

일찍이 이러한 모욕과 수치와 고난의 가치를 안 동광원의 창설자 이현필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언제나 언짢은 일을 좋아하게 하소서. 궂은 것을 즐겨 하게 하소서. 쓴 것을 달게 여기게 하소서. 대접받는 일을 중심으로 싫어하고 핍박과 수치와 천대를 꿀처럼 달게 여기고 악평과 훼방을 금싸라기 같이 여기도록 맘을 주시옵소서. 주여 비나이다.”

어쩜 수로보니게 여인은 악평과 수치를 금싸라기(금 부스러기)로 바꾼 현명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수치스러움으로 인해 돌아섰다면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또한 사람들의 악평이나 훼방이나 모욕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남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며 악평을 할지라도, 온갖 수치와 모욕과 때로는 애매한 핍박을 받더라도 이러한 것을 금싸라기처럼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에게도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임했던 부스러기의 은혜가 주어질 것이다.

능욕 받는 일을 기뻐하라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시기로 사도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 때문에 옥에 갇히기도 하고 공회 앞에 끌려가 온갖 악평과 훼방과 채찍질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러한 악평과 훼방과 핍박 앞에 굴하지 않았다. 도리어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며 기뻐하였다(행5:41).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능욕과 궁핍과 곤란은 결코 수치가 아니다. 자신의 연약함이 때로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가. 도리어 우리의 약함은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케 하는 아름다운 선물인 것이다.

정작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정욕을 우상단지로 모시고 헛된 명예욕과 세상의 부귀를 좇는 우리의 부패한 심령이다. 여전히 범죄할 기회만 주어지면 죄성에 지배받는 즉 애굽의 수치를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세상의 부귀와 명예는 잠시잠깐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위하여 받는 능욕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의를 위하여 받는 능욕은 천국을 얻는 지름길인 것이다.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영혼은 능욕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

수치와 능욕과 악평과 훼방을 경험해 보지 않은 자는 결코 주님이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가 없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에 아직도 현혹되어 있는가. 그곳에서는 결코 생명 되신 주님을 만날 수가 없다.

“세상이 나를 버리는 기쁨, 내가 세상을 버리는 기쁨”을 노래하며 스스로 버림받은 헌신짝이기를 원하셨던 이현필 선생님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모래알이 되어 잊히기를 원하셨던 소화 테레사처럼, 능욕과 멸시와 천대와 핍박 속에 완전한 기쁨이 있다고 노래한 프랜시스처럼, “나는 숫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요. 내가 신뢰하는 것은 단 하나, 예수님 한분이십니다.”라고 하시면서 한 영혼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셨던 마더 테레사처럼, 사람들이 알아주고 좋은 평가를 해주는 웃거름보다는 언제나 숨겨진 채 신령한 밑거름이 되기를 원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아, 언제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될까? 모든 자아가 다 깨어지기까지 금싸라기를 모으고 또 모아서 빨리 그곳에 다다르고 싶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