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만능의 시대
20세기까지는 그랬다. 무엇이나 잘하지 않아도 되었다. 남자는 남자로서의 일, 여자는 여자로서의 일, 그것이면 되는 시대가 있었다. 오히려 지나치는 것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엔 안 통하는 소리다. 21세기는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멀티 플레이어를 원한다.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할 수 있어야 21세기형 성공리더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한 만능 만들기 프로젝트는 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어도 멈출 수가 없다. 평생교육이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은 지식과 자격증의 노예를 만들고 웬만한 성인남녀가 가진 자격증은 보통 2-3개는 가볍게 내놓는 시대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왜 사람들은 더 고통하고 절망하는 것일까. 젊은이들이 깊은 절망에 빠져 생을 가치 없게 여기고, 오랫동안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 이들도 황혼 이혼이라는 선택 앞에 당당하기만 하다. 단호한 시대다.

고독할 틈이 없다

조금이라도 만능의 조건에 맞지 않으면, 아주 작은 흠이 있고 부족함이 발견 되어서 그것 때문에 내가 괴롭고 단체가 괴롭다면, 그 흠집을 자르고 파내어 과감하게 버려도 아무 거리낌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조금의 실수나 허점이 용납되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동정으로 변하기도 하고 인간적인 타협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래서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싶어 한다. 만능이 되고 싶어 한다. 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을 열망하고 그래서 집중하지 못하고 많은 것에 마음을 두게 된다. 고독할 틈이 없다.

골방으로 들어가기보다 넓은 곳으로 나아가 만능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많은 것들을 잘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많은 일들을 맡아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과 일하면서 누리는 즐거움이 자신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음악을 듣고 텔레비전을 보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면서 잠시도 혼자가 되지 못한다. 무언가 하고 있는 자신이 빛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오직 한 가지
인간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절대 고독의 공간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이 인정해야 하는 마지막 결론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이웃이,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아끼는 물건과 재능이 있다 해도 결코 채울 수 없는 공간, 절대 고독의 공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죄 없이 만드셨지만 죄인이 된 인간은, 결국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그 불완전함의 공간에서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것은 절망이 되기도 하고 때론 위로가 되기도 한다.
“저는 우리 주님이 쥐고 있는 몽당연필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며 자신의 길을 갔던 인도의 성녀 마더 테레사는 만능 신앙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가장 잘할 수 있었던 일은 한 가지 뿐 이었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예수님으로 대하는 것, 그것 뿐 이었다.
최춘선 목사님이 잘한 한 가지 일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분의 이름만 부르며 사람들 틈을 돌아다닌 것이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는 한 가지 일을 선택했다. 이것도 저것도 잘하는 만능이 되기를 꿈꾸지 않았다. 그는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했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었지만 그 약함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매순간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이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나님은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다. 그 고통이 너무 커서 떠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번번이 말씀하신다. 그러자 그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한다고 고백한다. 바보 같이.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12:10).

빛나는 것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는 만능에게서는 빛이 나지 않는다. 굳어진 목과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와 남을 판단하는 정죄의 잣대가 거짓말 할 때마다 길어지는 피노키오의 코처럼 날마다 길어질 뿐이다. 무엇이나 잘하는 사람이 되어서 인정을 받기보다 하나님을 위해 잘할 수 있는 한 가지를 깊게 파 보면 어떨까. 주님이 불완전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조금 부족해서 늘 울어야 하고, 조금 더디고 느려서 남들을 답답하게 하고, 시원스럽게 일을 처리하지 못하지만 반짝이는 보석을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 완벽해야 하는 만능의 요구를 따르다가 되지도 않은 것을 된 것처럼 여기며 위선으로 포장된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나 잘하는 것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더 빛나게 닦는 지혜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내가 하는 많은 일들이 다 빛나기를 바라면서 다리를 찢고 팔을 늘어뜨리느라 이웃의 맘을 상하게 하고, 이웃의 다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고, 이웃의 머리를 치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도 다 잘하고 싶어서 행해야 하는 어쩔 수 없음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는 것은 아닐까. 넘어지는 것조차 부끄러워서 숨어야 하고, 실패의 자리를 드러내면 안 되는 이웃과 살아가야 한다면 우리의 터전은 은혜를 잃어버린 자리가 될 것이다. 완벽한 컴퓨터요 로봇이 되어서 작은 실수조차 용납할 수 없는 심령에 빛나는 것은 교만과 아집, 포악의 덩어리일 뿐이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기에 그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완전해지는 것이다.

나를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는 원동력은 그럴듯한 구조와 일의 결과, 자격이 아니라 나를 통과해서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다. 약하기 때문에, 넘어졌기 때문에, 실수했기 때문에, 또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주님이 필요한 것이다. 할 수 없는 불완전함이 주님을 통하여 반짝반짝 빛나는 완전함으로 바뀌는 것이다.

주님 앞에 기준
예수님께서 집에 찾아 오셨을 때 마르다는 분주했다. 이것도 해야 했고 저것도 해야 했다. 마르다가 보아야 했던 마리아는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1-42).
예수님은 마르다를 책망하신 것이 아니다. 마리아의 선택이 지혜로웠음을 칭찬하신 것이고 마르다의 수고가 고맙지만 또한 염려되어 말씀 하신 것이다. 정말 잘하는 일의 기준은 성경이 정하여 주고 주님이 알려주신다. 그러나 그 기준을 놓고 언제나 불필요하거나 이상한 선과 악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교만함이다. 내가 조금 더 잘한다고 하는 자부심과 자고함은 언제나 패망을 불러왔다.
부족하고 연약해서 부끄러워했던 이들의 결말은 주님 앞에 내어 놓은 그 부끄러움과 부족함으로 인해 닦여지고 또 닦여져서 반짝반짝 빛나는 주님의 보석이 되었다. 빛나는 별은 어둠 속에서 더 빛이 나는 법이다. 우리가 가는 광야 여정은 나 혼자 빛나는 별로 드러나야 하는 곳이 아니다. 빛나는 별은,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웃과 더불어 수많은 빛의 덩어리로 하나 될 때 더 많은 어둠을 밝힐 수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