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선교사인가 일꾼선교사인가

마르다의 가슴은 예수님을 위한 식사 대접으로 흥분되었다. 좀더 맛있게, 좀더 풍성히 준비하여 예수님을 흡족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조여 오는데 손볼 일이 잔뜩 쌓여 있다. 눈치도 없는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꿇어 앉아 달콤한 말씀에 푹 빠져 있기만 하다. 드디어 분노가 폭발되었다. 아니꼬운 마리아에게는 말도 걸기 싫었다. 예수님께 푸념을 늘어놓았다. “동생이 나를 돕도록 그만 부엌으로 보내 주셔야지요.” 웬걸,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의 손을 드신다. “단 몇 가지만이라도 좋다. 한 가지도 좋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하셨다. 이는 잘 먹는 고구마를 임금님도 잘 드시는 줄 알고, 열두 가지 요리 방법을 동원하여 배부른 왕께 상 차려 드리는 격이다.

마르다는 부엌 일감에 포로가 된 셈이다. 반면 마리아는 빈 공간의 자기 영혼에 주님의 보화를 차곡차곡 쌓는 실속을 차렸다. 바짝 다가앉아 말씀을 경청했다. 드디어 놓치기 싫은 섬김의 시간이 포착되자, 그녀는 비싼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여자의 영광인 머리를 풀어 그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어 드렸다. 그 향유 값은 무려 300데나리온이었다(12:5). 예수님은 나의 장례 날에 쓰려고 예비된 것”(12:7)이라 하시며 만족해 하셨다. 십자가 사건에 가장 먼저 동참한 여인이 된 것이다.

그들의 오빠 나사로는 아무리 꼼꼼히 살펴보아도 봉사한 흔적이 전혀 없다. 마르다가 예수님과 상당히 많은 대화를 하고(11:21-27) 마리아도 간단하지만 몇 마디 나눈 반면에(11:32) 나사로는 오직 침묵이다. 한 일이 있다면 병들었다가 죽은 일이다. 무덤 속에 들어가 나흘이나 머물러 썩어 냄새까지 풍겼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다는 선포를 준비하기 위해 부활 과목 시간에 실험물질이 되어 부활의 권세를 증거토록 한 희생제물이 된 것이다. 그 파장이 얼마나 컸던가!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는”(12:11)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당황한 대제사장은 급히 살생부를 만들어 예수와 나사로를 요주의 인물로 점 찍게 되었다(12:10). 영원 영원히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이라는 부활 복음이 땅 끝까지 외치게 될 것을 사탄이 예견했기 때문이었다.

마르다가 예수님의 육신의 배를 채워드리는 인정 넘치는 고마운 일 했다면(예수님께 만족을 드리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마리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 나사로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등용되어 기념할 만한 일꾼이 된 셈이다.

일꾼은 주인의 일을 하는 자다. 주인의 영광을 위해서만 생존 이유가 있다. 그러다가 주인을 위해 죽는 자다. 주님 생각을 잊어버릴 정도로 일감에만 쫓겨 사는 어리석은 일꾼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영성도 감사도 사랑도 웃음도 상실한 채, 현재 일이 과연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있는 일인가 성찰할 일이다.

일감선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야곱이 라헬을 연애함으로 7년을 수일같이 여긴 것(29:20)처럼 예수님에 대한 흥분을 간직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나를 웅장하고 튼튼하게 건설하는 주님의 참 일꾼이 되어야 한다.

할렐루야!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