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오가 되신 예수님

며칠 전 선교수기 밀림속의 십자가라는 책을 접했다. 빛바랜 누런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를 읽으면서 별 기대 없이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의형제요 성경번역을 함께했던 인디오 친구 바비를 잃은 후 깊은 슬픔에 잠겼다. ‘왜 이리 어려울까? 어째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때 예수님이 보였다. 아주 무거운 짐을 지고 언덕을 올라가고 계셨다. 예수님의 얼굴은 슬픔에 잠겨 있었고, 등은 굽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이 십자가 때문입니다.”

개미가 된 한 남자

예수님의 슬픔을 등에 지고 정글 속으로 들어가 인디오의 친구로 살아갔던 브루스 올슨. 16세에 선교사로 첫 소명을 받고, 순수한 선교의 열정으로 19세 나이에 베네수엘라로 떠났다. 이후 콜롬비아 정글 지역에 사는 모틸론 족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사로잡힌 그는 온갖 어려움 끝에 400년 동안 외부인과 접촉한 적 없는 그들을 만나 함께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유코 족과 함께 살았는데, 음식이 끔찍했다. 날마다 치차와 강냉이뿐이었다. 치차는 옥수수를 씹어서 큰 바가지에 뱉은 다음 그 속에 효소를 넣어서 만든 것이었다. 음식과 온갖 벌레와 거처와 씨름하면서 그곳을 빠져 나오고 싶었으나 하나님은 노새를 통하여 발걸음을 두 번이나 돌이키게 하셨다. 그들과의 많은 대화 속에 어떤 한 민족을 온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그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알게 해주시기 위해서였다.

이후 험난한 여정 끝에 모틸론 족을 찾아갔지만 돌아온 건 화살이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 속에 하혈과 오한, 설사 등이 겹치면서 너무 힘들어 울기까지 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자 한 소년이 핫도그 크기만 한 구더기들을 담은 야자수 잎을 내밀었다. 가장 작은 것을 집어먹었다. 또 하나를 먹었다. 배는 불렀지만 소름이 끼쳤다. 남자들이 사냥을 나간 날, 그곳을 탈출하고자 하는 강한 끌림에 다리를 질질 끌면서 정글을 헤치고 나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치료를 받은 후 놀랍게도 곧 그곳으로 돌아갈 교통편을 찾았다. 그곳은 구더기를 먹기도 하고 위생관념이 희박해 음식물쓰레기나 배설물을 집에서 해결하며, 음식물이 썩어 독버섯이 필 정도였기에 온갖 전염병과 설사, 두통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유행성 결막염이 그 부족에 퍼졌다. 결막염을 치료할 의약품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로 그들에게 약을 나눠주지 않았다. 의사를 대신하는 마법사에게 경쟁자로 비쳐지거나 그 부족의 전통을 깨거나 분열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혜롭게 마법사를 세워주면서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약을 사용하여 그녀와는 친구가 되었음은 물론 다른 병을 치료하는 데에 조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과 가족이 되기까지는 긴 기다림이 필요했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예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던 중 한 가지 지혜가 떠올랐다.

개미집을 지어주기 위해 개미가 된 모틸론 인디오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개미들이 그를 알아보게 되고 신뢰하게 되었다.”는 그 부족의 전설로 성육신을 설명했다. 어떤 사람이 크고 강하다면 다른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작고 약해져야만 한다는 비유였다. 그를 통해 모틸론 족들이 만난 예수님은 인디오가 되신 예수였다. 그 역시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집을 지어주는 개미가 된 남자가 아니었을까.

그들의 언어로 말하다

호랑이가 말을 하면, 악령이 나타나 어김없이 사람들을 죽인다는 호랑이의 밤으로 불리는 날이었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밤, 그들 가운데 가장 먼저 예수님을 믿은 추장의 아들 바비가 밤새도록 찬양을 하였다. 다음 날 한 사람도 죽지 않았는데, 이는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 부족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비에게 체험한 것을 함께 나눌 것을 권했지만 바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축제가 벌어졌다. 그 축제에는 각자 여러 가지 상황들을 노래로 부르는 대회가 있었다. 바비는 그 노래 대회 때 주문을 외우듯 예수님에 대해 부르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나의 입속에 있다네. 나는 새 언어를 가졌다네. 아무도 그를 내게서 빼앗을 순 없다네. 나는 예수님의 말을 한다네. 나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걷는다네. 나는 예수님께 속했다네.”

마치 마법사들이 부르는 것처럼 부르는 바비의 노래가 듣기 싫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디오의 생활방식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 노래 속에 진정한 기쁨을 찾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모틸론 족에게 그에게 사용하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의 언어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고통의 샘에서 퍼올린 그의 글은 살아 움직이는 거룩한 언어였다. “하나님을 찾고 싶으면 하나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입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길을 여러분에게 알려주십니다.”

동역자이자 약혼녀인 글로리아의 예기치 않은 죽음, 밀림 개척자들에 의한 바비의 피살, 반군에 의해 거듭되는 피랍과 살해 위협 앞에서도 그는 한결같은 용기와 믿음으로 지난 반평생을 모틸론족과 함께 살아왔고, 일흔이 넘은 지금도 그들의 친구요 형제로 밀림 속에서 살고 있다.

그동안 난 상대방을 이해하기보다 내 주장과 경험과 나이를 앞세우곤 하였다. 상대방과 비교하여 일한 시간을 조목조목 따지며 불공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말로 상대방을 제압하려고도 하고, 상대방이 나와 같기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상대방의 언어가 아닌, 나만의 아집과 오만한 말로 더 큰 상처와 대화의 단절을 만들기도 하였다. 상대방의 약함을 짊어지기보다는 강하고 큰 사람으로 보이길 원하여 이웃에게 더 큰 짐을 얹어주기도 하였다.

모틸론 족과 동고동락하면서 작고 약한 자로 머물며 겸손과 사랑으로 섬겼던 브루스 올슨.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인간으로 오셔서 악취 나는 죄인들과 함께 머무셨던 우리 주님. 진정 강하다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연약한 사람이 되신 것처럼, 상대방을 위해 작아지고 약해지는 것이리라.

우리는 구더기와 벌레와 같고 티끌과 재보다 못한 존재다(18:27).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개미처럼 작아진들 어떠랴. 작더라도 주님이 거할 수 있다면 말이다. “누가 만일 아주 작은 자이거든 나에게로 오라”(9:4). 주님은 작은 자를 가까이 하신다. 작은 자에게 하나님의 손길을 드리운다(13:7).

나의 크고 강함이 상대방에게 도리어 상처나 걸림돌이 되지 않았는지 돌아보자. 진정 우리는 예수님처럼 작아지고 약해지지 않으면 이웃의 진실한 친구로 설 수 없다. 하나님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슬픔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허리를 굽히고 작은 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작은 자만이 겸손의 문을 지나 천국에 이를 수 있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