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노래로 부르리

포근하고 따뜻한 햇볕이 등 뒤로 따라온다. 높아진 하늘, 푸르러진 나무는 잎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다. 풍요로운 계절을 맞이하며 말을 건넨다. 구슬픈 마음이 익숙해진 지 오래된 심령인지라, 위로의 노래를 부르며 주님을 찾는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노래를 부르다 불현 듯 며칠 전 경북 경주에서 5.8의 강진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생각났다. 마지막 때에는 각처에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을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후에도 수십 차례의 여진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옆 나라 일본이 지진으로 인해 곤욕을 치를 때 이웃집에 불 난 것을 구경하듯 한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한국은 지진이 잘 일어나지 않았기에 대처방안이 미비하다. 고층 건물과 아파트가 빼곡한 산림 같은 한국. 이번 지진을 보며 앞으로의 상황이 그려져 아찔했다.

인간의 힘으론 피해갈 수 없는 재해를 보며 이 상황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고 준비해야 할까.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재난을 공포와 두려움으로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의연하고 강한 신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명확한 답을 찾을 순 없다. 진짜보다는 가짜가 많은 이곳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연의 법칙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근심걱정하거나 만족하며 연연한 채 살아간다.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들에 모든 힘과 정성을 쏟고,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도 놓고 가는 것들에 아쉬워한다. 명예, , 인맥, 성취한 일은 순식간에 연기처럼 날아갈 수도 있다.

명예나 돈, 스펙은 고사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것이 없다고, 낙담하여 인생을 비관해야 할 것은 아니다.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하게 스스로의 삶을 평가하며 주저앉을 것인가. 그렇다면 너무 허무하고 슬프고, 외로울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틀에 맞춰진 가치관 그대로를 따라가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며 선하신 분이다. 고독한 소수가 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부여해주신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가치관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것이 존재의 의미이기도 하다.

한 발자국 내딛기 어려운 현실이라 해도, 그것이 괴로워 늘 구슬픈 노래를 부른다 할지라도 괜찮다. 한낱 가벼운 인생이 그분 안에 존재하고,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아직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고 감사할 것이다.

언제쯤 가을빛 햇살을 받아 더 성숙해진 초록빛깔을 뿜어내는 나무들처럼, 언제쯤 높아져 깊은 호수 같은 하늘을 닮을 수 있을까.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믿음과 소망을 품고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닿아있을 것이다.

이 땅은 잠시 나그네로 머물 곳이기에 세상노래가 아닌 천상의 노래를 부르리라.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사랑의 노래를 기쁨으로 맞이하고 싶다. 더구나 지금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마지막 때가 아닌가.

수많은 노래 들 중 가장 뛰어난 노래 나를 향한 아버지의 노래. 아버지의 사랑으로 영원히 내 맘속에 새겨져 있는 아버지의 노래. 천상에 그 멜로디 창조주의 심포니 주 당신이 부르시네 나를 향해. 사랑의 왕을 주신 하늘의 그 신비를 주 당신이 부르시네 나를 향해”(아버지의 노래, 다윗의 장막).

하나님께서 지휘자가 되시고, 만물은 아버지의 사랑을 노래하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다. 이 땅과 작별할 때, 영혼의 지휘자 아름다운 손짓에 감격하여 노래할 수 있도록 주님이 설계하신 캠퍼스에 인생을 그려나가고 싶다. 다시 오실 그분이 기뻐하실 노래로. “나의 사랑아, 나의 어여쁜 이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이 지나고 비도 그쳤으며 땅에 꽃이 피고 산비둘기 소리가 들리는구나”(2:10-12).

허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