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평안

평강 덩어리를 소유한 사람들

19세기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영국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는 평소에 믿음과 소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다. 그가 죽자, 그의 친구는 이런 글을 남겼다.

“그의 삶은 평안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였다. 천국 은행에서 매일의 양식 즉 ‘주님이 주시는 평안’(요 14:27)을 가져다 쓰는 듯했다. 성령님이 동요하지 않는 일에는 그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삶의 문제가 있거나 매우 심각하고 다급한 순간에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을 소유했다. 그는 좀처럼 서두르거나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속으로 원통해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명철을 뛰어넘는 평안을 알았고, 그 평안이 없으면 살지 못함도 알았다.”

한번은 허드슨 테일러가 선교사들 지망생들에게 질문을 하였다. “자네들은 왜 중국 선교를 희망하는가?” 그들 대부분은 척박한 중국 땅에 교회가 세워지길 원하기 때문이라도 답을 했다. 이에 허드슨 테일러는 조용히 다음과 같은 답을 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중국에 간다네.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의 사랑과 은총이 내 가슴을 타오르게 하고 그 감격이 타올라서 여기 중국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도 여기 있는 것일세.”

허드슨 테일러에게 임한 평안은 생명의 능력에서 나온 평안이다. 죄로부터 해방된 평안이 그의 안을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었기에 그 어떤 일에도 요동치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이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는 그 평안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정도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무명의 병상의 증거자로 40년을 살았던 어느 성도님은 평강 덩어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의 생명에 합일된 사람들이 누리는 진정한 평안의 경험을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평생을 병상에 누워 계시며 복음진리를 전하시는 삶을 사셨는데,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형편이셨다. 평소, 계란 깨지는 소리에도 어이쿠, 하며 두근거리곤 하던 가슴이 어느 날부터는 전혀 그 어느 것에도 놀라거나 요동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바로 머리 위에서 무거운 추가 떨어질 것처럼 흔들리는 순간을 맞이하거나 놀랄만한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마음속에 꽉찬 평강 덩어리가 조금도 요동하지 않게 잡아준다는 것이다.

광야 길을 가면서 허드슨 테일러처럼, 병상의 증거자 처럼 평안을 취하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디 있을까. 하루에도 수십 가지의 이야기들을 듣고 전하고 느끼고 생각하며 사는 우리 인간들에겐 세상은 불안과 염려의 터전이다.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소망하고 살아가면서도 때로는 불안과 염려로 근심하며 안타깝게 살아가고 있다.

조급하거나 안달하지 않아도 되고, 관심 받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거나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 하지 않아도 되는 참 평안을 누구나 소유하길 원한다. 모든 것의 정답이 되시는 하나님에게 전부 내어 맡기고 그 어떤 일에도 놀라거나 흔들리지 않는 참 평강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하고 기쁨이 없고 우울하기까지 한 현실은 우리들의 광야 길을 가끔씩 지치게 하는 요소로 다가온다. 진정한 평안을 묻는 질문에 성 어거스틴은 대답했다. “주님나라 이를 때까지 참 평안은 없습니다.”

 


평안의 줄을 끊는 적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8)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육신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 원수 되는 일에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은 우리를 평안하지 못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지치게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한마디로 말해서 전쟁터다. 바다의 모래알처럼 무수한 관계 속에서 저마다 각자 자기의 이기적 욕망의 충족과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 분주히 움직인다. 성공의 기쁨과 희망보다도 실패의 불안과 공포의 의식을 무겁게 짓누르고, 경쟁과 대립, 적대와 긴장의 이익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저마다 피곤하고,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실패의 불안과 실업의 불안이 악몽처럼 따라 다닌다. 신앙인들마저도 불안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현실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줄을 일시적으로만 잡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평안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세력이나 시험의 불이 다가오면 이기지 못하고 바로 평안의 줄을 놓아 버리고 마는 나약함이 우리 안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육신의 세력은 무섭고 끈질기며 지속적인 힘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세상에서 세상의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달콤한 육신적 즐거움을 끊어 내기가 쉽지 않다. 어떻게 해서라고 합리화하고 명분화 하며 육신 속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서 일시적 쾌락을 즐기고 싶은 욕망이 너무도 크다. 하지만 그 순간 영혼으로부터 오는 평안의 줄이 끊어진다는 사실은 기억 하지 못한다. 기억이 나도 애써 지워버리거나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안 “하늘로부터 오는 평안”을 누리게 되는 그 신령한 기쁨이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시험 고통과 시련을 겪으며 단련을 받는다. 하지만 하늘의 평안을 가진 사람은 그 상황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 상황을 대처할 줄 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 초점을 바로 아는 지혜가 있다. 그 순간이 지나고 진정한 평안이 다가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의 고통과 어려움을 호소하며 육신의 세력을 끊어 내지 못하면 평안의 줄이 끊어지고 만다. 하나님은 육신의 세력과는 함께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정답이신 하나님

두 명의 화가가 있었다. 이들은 ‘평안’이라는 주제로 각각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한 사람은 먼 산 그림자가 은은히 잠겨 있는 고요한 호수의 풍경을 그렸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억수 같이 쏟아지는 폭포 아래 휘어져 있는 자작나무 가지에 둥지를 틀고 물보라에 거의 젖은 채 쉬고 있는 한 마리의 새를 그렸다.

어느 그림이 평안의 진수를 묘사했는가? 이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고적한 산속의 호수와 같은 쉼을 찾기가 어렵다. 오히려 우리는 현실의 삶의 소란함 가운데서 쉼을 찾아야 할 때가 더 많다. 우리는 평안을 ‘전혀 문제가 없는 삶’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환난과 고통 가운데 이기고 극복하여 누리는 평안이 진정한 평안이라는 말이다. 정답은 하나님께 있다. 평안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데서 나온다. 예수님께서 폭풍 가운데서도 평안히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인 믿음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교과서의 정답이신 하나님의 방법이 너무도 선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데서도 아무에게서도 평안의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부르시는 주님은, 어떤 역경과 환난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시편 56편 3-4절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으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이다. 바다와 같은 드넓은 세상을 항해 하는 삶의 여정이 비록 험난한 파도를 헤쳐 가는 고난의 길일 지라도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 하늘을 소망하며 늘 맑은 가락이 그윽이 울려나는 평안의 삶이 되도록 힘을 내보자.

하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을 선물하기 위함이시다. 이 땅의 삶을 살면서 당하는 고단함의 과정들을 성령의 힘으로 극복하고 승리해서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며 나아가는 자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두려움의 해답이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면 신령한 영혼의 복을 받는다. 아울러 그 사랑의 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된다.

폭풍우 속에서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순간의 두려움에 몸을 떨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폭풍우가 끝난 후 누리게 될 따사로운 햇살과 더 푸르러진 나뭇잎의 진한 향기를 곧 느끼게 될 것이다. 죽음보다 강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약속하셨다. 그 평안의 줄이 우리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이제 그만 육신의 세력은 끊어 버려야 한다. 그것이 끊어지는 아픔은 우리를 고통하게 하지만 그 순간 다가오는 영혼의 햇빛은 평강의 덩어리가 되어 우리를 휘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달콤한 순간을 어서 맞이해야 하지 않을까.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