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함을 벗어나는 은혜

답답할 때가 있다. 권태감이 밀려와 지저분한 행색으로 지내는 일도 답답하지만, 일이 계속 어긋나 속상한 것도 답답하다. 오해 속에 억울할 때도 있고, 모함과 거짓 속에 모든 관계로부터 떠나고 싶을 때도 있다.

이기심에 지치고 욕심과의 싸움에 지쳐 삶의 의욕이 사라지고, 안팎이 다른 대화에도, 복수를 벼르는 미소에도 진저리가 난다. 진보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때, 진실한 회개가 멈춰버렸을 때, 스스로 고립되고 싶고, 죽음이 속히 다가왔으면 싶고, 세상에 아무 소망도 없을 때, 입구 없는 캄캄한 미로동굴에 갇힌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룰 수 없는 한계 앞에 그만 가던 길도 멈춘다.

이렇게 힘이 드는데 도대체 주님은 언제 오시는가. 괴롭고 답답하여 터지는 탄식이요 견디기 힘들어 새어나온 불평이지만, 이 질문은 모순이 가득하다. 익은 열매가 되지 않고는 추수하러 오실 예수님은 소망이 아니다. 연단이 마련된 광야에서 정결해지지 않고는 주님의 재림 소원은 헛된 신기루다. 어찌 정화되지 못한 자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신 거룩하신 주님의 얼굴을 뵈올까. 어찌 미움이나 서운함을 품은 채 원수를 사랑하라하신 주님의 사랑을 꿈꿀까. 제 십자가는 내버린 자가 어찌 십자가 지고 가신 주님을 만날까.

그러나 이 모든 모순은 홀로 있다 여기기에 생기는 고통이다. 탄식조차 주님이 주시는 은총이라면 어찌할 건가. 외로움도 고통도 주께서 허락하신 환경이라면, 슬픔도 우울함도 능히 막으실 수 있는 하나님의 묵인이라면 다 이유가 있지 않으랴. 세상 어디에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있을까, 영이신 그분이 가시지 않는 곳은 영계를 통틀어 지옥밖에는 없다.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고로 실상은 우리가 모를 뿐이다. 하나님은 성령님으로 우리의 모든 삶에 함께하신다. 고통 속에도, 슬픔 속에도, 지루한 인생살이의 외로움과 낙심의 순간에도, 절망과 죽음의 순간에도 그분은 함께하신다. 장작더미 위에도,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밥이 되는 시간에도, 풍랑과 폭풍우 속에서도 즐거움과 감격이 넘치는 때와 같이 전능하신 주님은 함께하신다.

심호흡을 크게 하여 보라. 산소가 폐 깊숙이 들어온다. 고개 들어 숲을 보고 하늘을 보라. 장마에 젖지 않는 대지가 있는가. 빛을 피할 하늘이 있는가.

가장 고독할 때 주님은 가장 가까이 계시다. 가장 비참할 때, 가장 아프고 슬플 때 고통 중의 주님이 십자가의 강도에게 하신 것처럼 옆에 계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1:29).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5:10).

이것을 굳게 믿는 것이 은혜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