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임재와 기도응답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

기도했던 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기도 응답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데, 받았다고 해도 안 받은 것이 굉장히 많다. 공연히 들떠서 받은 것처럼 하는 부분들이 참 많다. 사람들은 기도 응답 받으면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하는데, 평안해도 응답이 아닌 것이 엄청나게 많다. 기적도 체험하면서 틀림없이 병이 고쳐졌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면 응답이 아니었던 경우가 있다. 틀림없이 받은 것으로 알았는데 아닌 것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 현실로 확실하게 나타나야만 응답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분으로 확신이나 평안이 생기고, 어떤 음성을 들었다거나 뜨거운 불을 체험했다면 틀림없이 응답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중에 보면 안 된 것이 더 많다. 또 그런 것 없이 응답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때가 되면 응답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이 평안하면 응답 받은 것 같고, 불안하면 응답 받지 못한 것 같다고 하나, 기도 응답은 기분상태에 따라 되고 안 되고가 아니다. 그런 게 없어도 나중에 보면 응답 받은 경우가 있다. 우리는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왜 응답을 안 주실까? 이제 하나님이라고 하지도 않을 거야.’라고 해도 나중에 보면 응답을 주셨다는 것이다. 어떤 분은 나는 틀림없이 응답 받을 거야. 확신해. 그 기도할 때 마음이 평안해졌거든.”이라고 한다. 그런데 응답을 못 받는 경우도 많이 있다.

기도생활이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기도 응답을 잘 받을 수 있을까? 기도생활이 중요하다. 간절하게 기도하고, 낙망치 말고 끈기 있게 기도하라고 했다(18:1). 그러니까 확실하게 응답을 받아야 할 어떤 기도제목이 있다면 그렇게 기도를 해야 한다.

너무 매달리면 아집적인 기도가 되기 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주님은 끈기 있게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을 하신다. 다급하게 발등에 불 떨어진 문제가 있으면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좀 약하다.

하나님이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것 같은 때, 하루하루 잘 참고 인내하면서 기도하면 천국에 가서 받게 될 상급이 더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매일매일 하루살이가 살아가는 것처럼 잘 참고 견디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하노라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때가 온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응답이 안 되니까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너무 어려우니까 그런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불신자들이 그렇게 많아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가르치는 사()신학자들이 있어도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다. 천국과 지옥도 틀림없이 있다. 그러니까 억지로 세상을 떠나려 하면 손해 많이 보고 나중에 후회하게 될 테니 잘 참고 견디면서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실 때까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잘 살아가야 한다. 좀 어렵더라도 예배, 기도회, 신앙적으로 필요한 일들을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면서 말이다.

고통을 극복하면서 조금씩이라도 일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아프다, 아프다.” 하면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생활이 되기 쉽다. 좀 어려워도 예배라든가, 기도회에 꾸준히 참석하려고 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면 하늘에 상급이 쌓일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더 진보되는 것이다. 육신을 입고 말씀 따라 행한 일에 대해서만 상이 있다. 고통당할 때는 물론 빨리 세상을 떠나고 싶겠지만 참는 것이 복된 것이다.

우리가 정욕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나 금식을 할 때일지라도 응답받는 경우를 자주 본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적들이 정욕적인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병자들이 고침 받고 악령 들린 사람들이 고침 받고, 오병이어나 칠병이어 등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구약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면서 구한 것이 있었는데 대부분 정욕적인 것이었다. 아주 불순한 것이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다. 그런데 이런 응답은 꼭 중보자를 통해서 하셨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14:14). 불순한 동기, 정욕적인 마음으로 드려진 기도라도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더라는 것이다. 이는 정욕적인 것일지라도 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끈기있게 기도생활을 하라는 자체에 의미가 있다.

임재를 갈망하라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왜 두세 사람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했을까? 한 사람이 있는 곳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을까(18:20). 두세 사람이 합심기도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혼자 기도하면 나는 거기 없을 것이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언제나 느끼면서 살면 참 좋을 텐데 우리는 참 많이 부족하다. 썬다 싱 성자는 특별히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는 생활을 잘 하시고, 그것을 글로 표현한 분이다. 그분은 모든 사물을 초월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하고자 최선을 다하셨다. 그것이 순간순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는 폭넓게 볼 수도 있고 좁게 볼 수도 있다. 썬다 싱은 신비가란 어떤 몽롱한 체험 가운데 환상을 보고 영음을 듣고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참된 신비가라고 할 수 없다. 신인합일의 경지에 들어가서 매일매일 몸으로 하나님을 신비롭게 체험하는 생활을 계속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바로 참된 신비가다.”라고 하였다.

광야를 통과하는 성도들도 출애굽할 때부터 가나안땅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 가지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어쨌든 그런 체험이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더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임재라는 것은 은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의심 없이 믿어지는 것이다. 밖에 있든, 화장실에 있든, 잠자리에 있든, 어디에 있든 의심 없이 하나님이 믿어지고, 속삭이고 싶은 감정도 생기는 것이다. 이런 것이 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비체험만 너무 강조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아가 깨어지면 깨어질수록 임재를 더 많이 느낄 수 있게 된다.

썬다 싱이나 워치만 니 성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많이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신비한 체험이 아닌 실제이기 때문이고 그것을 통해 깊은 영적 세계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와 임재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더 원하기에 기도하게 되고 그러면 주님을 만나는 임재의 삶은 당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기 원한다면 갈망하라, 그리고 기도로 그분을 만나라. 기도 응답은 덤으로 주어지는 은총이다.

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