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라 내 영혼아

살림이 가난해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세상이 어려워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나라는 망해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사회는 소란해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배울 길은 막혀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사람들이 욕하고 비웃어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몸은 병들어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육신은 죽어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이용도 목사

지난 517일 새벽 120분경, 서울의 강남역 인근의 한 화장실에서 20대 초반 여성이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2014년부터 최근까지 신학원에 다닌 34살 김 모씨로써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자들에게 무시를 당했고 그 보복으로 전혀 일면식이 없는 여성을 살해한 것이었다.

경찰이 피의자에 대한 심리분석 결과를 발표했는데, 김씨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계획하지 않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분석했다. 요즘 일어나는 사회의 사건들을 보면 좀 더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사건을 경쟁이라도 하는 듯 무섭고 기이한 일들이 앞 다투어 일어나고 있다. 연인과 헤어져서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종종 있고, 엄마가 아이를 때려서 죽인 경우도 있었고, 어버이날에 아버지를 살해한 남매도 있었다.

인간관계, 우울증, 정신질환, 가정환경 등 안타깝기도 하고 안쓰러운 갖가지 이유를 붙여보지만, 결과는 세상이 분노로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다. 범행 동기가 말도 안 되는 것들도 적지 않다.

최근 뉴스는 마치 사회 전체가 ‘분노 조절 장애’라는 일종의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차를 추월하거나 경종을 울렸다고 끝까지 따라가 시비를 벌이다 더 큰 사고를 내고, 아파트에서 층간 소음 문제로 다투다 상해를 입히는가 하면 죽이기도 한다. 화가 난다고 사람을 자동차로 들이받고 쓰러진 사람 앞에서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고,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등 우리는 지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아주 조금만 건드려도 분을 참아내는 인내력이 사라지고 폭발해 버리는 실정. 정말 아주 조금만 자극하면 즉흥적, 극단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는 세상이다. 하나님의 근심은 날마다 늘어만 가시는 것이 아닐까.

울지 않고 춤추지 않아

영적으로 무감각한 이상한 세대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장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예로 들어 비유하셨다. 그 중에서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라는 말씀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장례식 놀이’를 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쪽의 아이들이 곡하는 흉내를 내기 시작하는데도 다른 한쪽의 아이들은 그것을 함께 따라하지 않았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이 보였던 냉랭한 반응을 비유하신 말씀이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죄를 ‘애곡’ 즉 ‘회개’하라고 외친 선지자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도 ‘울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실 메시야를 영접할 준비를 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죄를 일깨워 주고 회개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다. 자신 역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는” 철저한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 세대의 사람’들의 반응이란 마치 동무들이 애곡하며 장례식 놀이를 시작해도 함께 가슴을 치며 호응하지 않는 무심한 아이들과 같았다.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귀신 들렸다”라고 즉 ‘미쳤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무반응과 분노의 세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교회와 성도들은 그저 “평안하십시오, 복 받으십시오, 만사형통하시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말들을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10:12-15)고 말씀하셨다.

자기 죄를 두고 애통할 줄 모르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실로 하나님 앞에서 가장 교만한 마음이다.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중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었고 “두로”와 “시돈”은 예로부터 우상숭배로 악명 높은 곳이었고 “소돔”은 잘 아는 대로 성도덕 문란의 최악의 표본 같은 도시였다. 하지만 회개할 줄 몰랐던 이 갈릴리의 세 동네들은,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오히려 그 악명 높은 두로와 시돈과 소돔보다도 더 악했으면 악했지 조금도 나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 재림의 날에 누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최악의 심판을 받게 될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선언하셨다.

그 “너희”란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구원의 권능, 교회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온갖 은혜, 아무 핍박도 박해도 없는 평화로운 시대, 이러한 것들을 마음껏 누리면서도 전혀 회개할 줄은 모르는 ‘완고하고 교만한 세대’를 가리키는 말씀이 아닐까?

기뻐해야 할 이유

세상을 보고 시대를 보면 기뻐할 일이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주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 희락은 항상 기쁨이 있는 것이다. 괴로움이 많은데도 밝은 표정으로 지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으면 우울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희락의 은사는 기쁨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한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밝은 표정으로 생활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까지도 잘 보살펴준다.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육적인 것이 많다. 세상적으로 잘된 것 때문에 굉장히 기뻐한다. 영적으로 잘되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잘되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만나던 날부터 성령께서는 함께 하시면서 동행하시는 가운데 필요한 기쁨, 필요한 감사, 필요한 은혜, 필요한 찬양을 주신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성령충만을 구해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목표를 향해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돕는 은총이 없으면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다. 자아가 깨어지는 것도 도움을 받으면서 깨어지는 것이다.

그 자아가 하나하나 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고난을 주시고, 자아가 하나 깨어지면 연거푸 고생 가운데 들어가게 하시지 않고 풀어주시고 그러면서 우리 안에는 기쁨과 평강,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꾸 우리를 키워나가시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고난만 주셔서 높은 경지에 올려놓으려고 하시지 않고,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 생길 때는 당할 즈음에서 피할 길을 주셔서라도 가볍게 해주시고,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과 평안과 위로를 받게 하신다. 그러니까 결코 한평생 평탄할 수만도 없고, 한평생 고생길을 걸어야 할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성자들이라도 하나님이 계속 고난을 주시지 않았다. 고난을 주셨다가 풀어주시고, 즐겁고 평안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때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시면서 진행하신다. 언제나 열심히 기도하고 간절하게 매달려서 영적인 기쁨을 자주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영적으로 빨리 성장할 수 있다. 순간순간 돕는 은총,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우리에게 있으니 그것을 믿고 바라면서 나아가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적으로 빨리 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된 것만으로도 우리가 기뻐할 이유는 충분하다. 울지 않고, 춤추지 않는 세상, 어둠을 향해 질주하는 세대를 향해, 기뻐할 이유를 말해줘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