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랴
최근 우리나라는 장기적인 코로나사태로 인한 경제활동의 제약과 극단의 정치적인 대립 및 갈등으로 인한 과중한 불안과 스트레스가 넘쳐나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소한 일에도 참지 못하고 폭력사태로 이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연약하여 우울증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성경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마음을 지켜라                              
지난 2018년 1월 10일, 지나가다 어깨를 부딪쳤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한 뒤 3년 동안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던 40대 남성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다.”는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용인의 한 상가 복도에서 30대 남성과 어깨를 부딪친 뒤 시비가 붙었다. 00씨는 조씨를 10여분간 무차별 폭행했다. 조씨는 치아와 치근이 여러 개 손상되고, 방광이 파열되어 수술 후에도 후유증으로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생활해야 했다. 그 후 조씨는 폭행으로 인한 분노와 공황장애 때문에 약을 먹었지만 약물부작용으로 말이 어눌해졌고, ‘한순간에 가장 노릇을 못 하게 됐다.’며 자주 눈물을 흘렸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마음이 병들면 우울증에 시달려 인생이 망가지기 쉽다. ‘우울할 때 어떤 반응을 하는가.’가 그 사람의 본질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못하고 쌓이게 되면 피해의식과 분노가 마음을 사로잡고 심한 무기력증에 시달린다.
어떤 사람은 불행의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거나 엉뚱한데 화풀이를 한다. 무기력과 권태에 빠져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거나, 혹은 TV나 게임, 유투브 동영상을 보는 등 육신의 오락거리를 찾게 된다. 심하면 집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거나 계속 울면서 자책감과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우울함은 감정의 반작용이다. 큰일을 치르고 나면 감정의 반작용으로 우울함이 밀려온다. 뜻밖의 사고로 신체장애를 입거나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 혹은 조직이나 단체에서 큰일을 앞장서서 감당했는데,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심한 비판을 받았다든지 하면 자기연민에 빠지기 쉽다.    
반면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환난과 시험이 닥칠 때 말씀과 기도로 주님께 나아가야 거친 생활인격이 정결해져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심령에 부어지는 소망을 이룬다’(롬5:3-5). 사람은 환경이 좋을 때보다는 힘들고 어려울 때 가장 크게 성장하는 경향이 있다. 인격의 변화와 영적인 성장은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와 긴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고 백성들을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했다. 하지만 그런 놀라운 승리의 반작용으로 극심한 우울모드에 빠지게 된다. 바알의 열혈숭배자 이세벨이 그를 죽이겠다고 맹세하자, 탈진하여 로뎀나무 아래에서 여호와께 죽기를 간구할 정도로 극심한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호렙산 동굴에서 여호와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다시 회복하여 충만해졌다.    
엘리야와 같은 극심한 환경은 아닐지라도 인생을 살다보면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발생한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은혜와 승리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묵상하며, 내 힘과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감사가 나온다.
어느 때보다 믿음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이다. 전 세계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렵고, 영적으로도 교회가 세속화된 혼탁한 시대다. 하나님께서는 잠자는 교회를 깨우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 코로나 팬데믹을 허락하셨다고 본다. 그래서 더욱 성경적 건전한 가치관과 믿음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낙심 좌절하여 이런 사태를 허락하신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되어 영적으로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는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하겠다. 
 
 
믿음으로 살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코로나 팬데믹도, 어떤 정치적 세력도, 인간관계, 물질, 노후문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극복할 수 있다. 성도의 최후 승리가 어쩌다가 운좋게 얻어지거나 겨우 간신히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성취해 놓으신 완전하고도 결정적인 승리에 동참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업도, 가게도, 개인도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경제 불황이나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절망이다. 이런 절망의 시대에 나타나는 퇴폐적 현상이 도박과 한탕주의다. 점집들은 여전히 성황이다. 1년 점술산업이 4조원, 역술인이 45만명, 역술 사이트가 2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경제가 어려우니 요즘 요행이나 행운을 바라는 심리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행운의 사전적 의미는 ‘행복한 운수’요, 요행은 ‘뜻밖의 행운’이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다. 사람들은 네 잎 클로버 한 장을 얻기 위해 수많은 세 잎 클로버를 짓밟고 있다. 발밑에 짓밟힌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뜬구름 같은 ‘행운’을 얻기 위해 작고 소소한 ‘행복’을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포기가 없고 절망을 모른다. 왜냐하면 절망의 밤에 더욱 빛을 발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갖지 못한 내세의 소망인 하늘의 상급과 익은 열매(성화)라는 신앙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배후에서 마귀가 아무리 역사해도 우리에게는 사랑과 능력이 무한하신 예수님이 계신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이랴. 우리가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다할지라도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리라 믿는다.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