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사는 목적


그리스도인은 사는 목적이 달라야 한다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10:3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뜻에 순종하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될 줄 믿는다. 즉 인생을 사는 목적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사는 목적이 달라지려면 기도제목부터 달라야 한다. 대부분 “자녀들이 잘 되게 하여 주소서. 사업이 잘 되게 하여 주소서. 부자가 되게 해 주소서. 성공하게 해 주소서”라고 뭘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여,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 어떻게 하리이까,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기도해야 한다.
사울도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메섹까지 원정 갔지만,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했다. 기도가 달라진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어리석은 지혜자가 되는 것보다 영리한 바보가 되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순종했다. 그가 똑똑한 사람이라면 그러기 전에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물었을 것이다.

성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보스러움이다. 바보는 시키는 대로 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바보는 꾀를 부릴 줄 모른다. 바보는 불평이 없고, 교만하지 않다. 욕심이 없으며 남을 해치지 않는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참된 바보가 되어야 한다. 왜냐 하면 남이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까지 가 주고,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도 돌려대고, 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원수도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나치게 똑똑하고 약삭빠르면 친구도 없고 재미도 없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에 비해 좀 바보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산(聖山) 장기려 박사님이 생각난다. 어느 해 설날이 되어 제자들(북에서 같이 월남한 사람들)이 세배를 하였다. 그 중에 총명하기는 하지만 욕심이 많은 제자가 염려되어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올해는 날 좀 본받아 보게나.” 그 제자가 “스승님을 닮으면 바보 되게요.” 허허 웃으시면서 말했다. “내가 바보소리를 듣는 것 보니까 이제 성공한 것 같구만. 여보게, 세상에서 바보로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자네 아는가?”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운영하고자 일생 헌신한 의사였다. ‘돈이 있으면 치료비를 내시고, 없으면 그냥 가세요’라는 식의 병원 운영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간혹 돈이 있는 사람들도 욕심을 내어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다. 하루는 옷도 멀쩡하게 있고, 손에 다이아반지까지 낀 사람이 치료를 다 받고 난 뒤에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장기려는 “그래요, 없다면 할 수 없지요. 그냥 가시죠.”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서무과 직원이 박사님에게 손짓 눈짓으로 그 사람의 손가락을 보시라고 한다. 그 환자가 돌아간 후 장기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도 보았지. 그러나 돈이 없다고 하는 사람 한둘을 의심하다보면 진짜 가난한 환자도 의심하게 되지.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과 자기 양심은 못 속인다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 부산의 밤거리,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있는 시간에 한 제자와 함께 야시장을 찾았다. 새벽기도 중에 202호실 환자의 해진 내복이 떠올라 주님께서 자신에게 사주라고 하시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내복가게에 들린 것이다. 두툼한 남자 내복을 하나 들고 얼마냐고 물으니, 주인이 선심 쓰듯 “500환이 본전인데요, 가게 문도 닫을 시간이고 하니, 450환에 드리지요.” 이 말에 정색을 한 장박사님은 “내가 이제야 대한민국 백성들이 가난하게 사는 이유를 알 것 같소. 아니, 주인장. 500환 물건을 어찌 손해 보면서 판단 말이요. 여기 600환이요. 손해 보면서 물건을 팔면 언제 돈을 벌겠소.” 주인은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게를 나가면서 곁에 있던 제자가 세상물정에 어두운 스승을 안타까워하면서 뭐라고 하니, 장기려는 “내가 왜 그것을 모르겠나. 하지만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이 다시는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했다. 참으로 바보스런 삶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빛을 따르고자 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약삭빠른 사람들에 비해, 제 몫을 못 찾아먹고, 다소간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바보라고 놀림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도 그렇게 평가하실까? 수많은 성화된 성도들, 예수님을 온전히 본받고자 자신의 일생을 바쳤던 믿음의 선진들은 주님 때문에,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이 땅에서 거룩한 바보로 사는 것을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 바보가 되고자 작정한 사람들이었다.

도암의 성자 이세종은 자신은 ‘세상으로부터 종친 인간’이란 의미로 이공(李空)이라 했다. 그 또한 거룩한 바보였다. 그의 아내 문순희 여사가 두 번식이나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서 가출했는데도 말없이 받아주었다. 못 살겠다고 아내가 저 능주골 아이 셋 달린 홀아비를 찾아 갈 때도, 지게꾼을 불러 부엌살림 일체를 지워서 보냈다. 그리고 가끔 아내가 생각나면 그 영혼이 불쌍해서, 전도차 심방을 갔다. 물론 홀아비의 아이들에게 줄 과자를 사들고서.
어느 날 가보니 마침 부엌에서 문순희 여사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이공을 발견한 그녀는 대뜸 “싫다고 했으면 그만이지, 왜 또 왔어! 날 망신주려고 왔지?” 그러면서 구정물을 이공에게 끼얹었다. 이공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해가지고 하는 말이 “하나님을 잊지 마시오. 하나님을 꼭 믿으시오. 살다가 살다가 어려우면 다시 오시오.” 했다.

이렇게 철저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하기 때문에 바보같이 살았던 분들이 있다. 겉으로는 바보 같고 일시적으로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결국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때는 차고 넘치게 풍성하게 갚아주신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다. 그분들이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은 또한 얼마나 클 것인가. 이 사순절에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거룩한 바보로 살아보는 것은 어떨런지.
이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