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아픔을 보는 눈(사53:4-6)
사람마다 인격이 다르고 신앙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도 다른다. 특히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을 더욱 달랐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을 하실 때에 어떤이는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 어떤이는 엘리야가 다시 왔다. 어떤이는 에레미아와 같은 사람이다. 또 다른 이들은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 했다. 그 중에서 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바르게 고백을 했다.(마16:16)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난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다.”(4절)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마음껏 모욕하고 멸시를 했다.(3절) 이 예언의 말씀 뿐만아니라, 이사야의 때의 한 사건이 아니라, 실제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그 현장에서 그렇게들 하였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한 사람으로 보았기에 채찍질하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홍포를 찢어 제비 뽑아 나누었다. 군중들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며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여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조롱을 했으며,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되 자기를 구할 수 없도다.” 했으며, 심지어 옆에 있던 강도들까지도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조롱을 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따르고 그에게 배웠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모두 도망쳐 제 갈길로 가버렸다.    본문은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에 상관을 하시지 않으시고 그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의 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심을 말씀을 하시고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말씀을 하신다.(4절) 곧 고난의 종, 예수님이 짊어진 고난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 때문임을 말씀하시고 있다. 곧 대신 당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시고 있다. 그 극심한 고난에 대해서 짧은 3절에서 ‘질고’(2회), ‘간고’, ‘징벌’, 고난’, ‘찔림’, ‘상함’, ‘징계’ 같은 용어를 집중적으로 사용하여 강조하시고 있다. 실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당한 고통은 어떤 인류가 당한 고난보다 크다.
   그럼 왜 이런 고통을 당하셨는가? 5절에서 말씀을 하신다. 허물과(5a), 죄악 때문임음 말씀하신다.(5b,7절). 죄값은 사망이다.(롬3:23)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번영을, 그의 조롱 당함으로써 우리에게 평화를, 그가 고난을 당함으로 우리에게 치료를 주시기 위함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 6절에서 길 잃어 버린양과 속죄일에 희생양을 대조 시켜서 비유로써 말씀하시고 있다. 곧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어떻게 보는가? 예수님의 고난을 한 유대 종파의 순교자로 보는가? 좋은 선생으로 도덕적인 선을 보이기 위해 희생하는 도덕군자로 보는가? 아니면 날 위해 십자가에 고난 당하신 구세주로 보는가?  고난을 보는 견해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주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