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흠뻑 젖은 묘비


며칠 전 신학생들과 벽제 계명산 수도원을 다녀왔습니다. 몇 년 만에 찾은 그곳은 포근한 어머니 품과 같았습니다. 박공순 원장님은 예전보다 더 연로해 보이셨지만, 더 따뜻한 어머니와 같았습니다. 오래간만에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 맨발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이현필 선생님이 계셨던 그 집은 문이 잠겨있고 아무도 살지 않았습니다. 이현필 선생님의 묘지를 찾아 그 곳에서 한참을 기도했습니다.
“봄바람은 나부끼고 묘지위에 제비꽃이 피어있는 그 모습은 세상을 멀리하고 숨어서 말없이 순결한 삶을 사시는 수녀님들 같았습니다. 새들이 주위에서 아름답게 노래하고 따스한 햇살은 언 몸을 녹여주었습니다.
오 하나님! 이 죄 많은 인생을 불쌍히 여기소서.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한 이 죄인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돌팔이 수도사를 불쌍히 여기사, 이곳에 누워계신 이현필 선생님처럼 주님을 사랑하다 익은 열매되어 죽게 하옵소서.”
묘 옆에 까만 묘비가 있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동광원과 귀일원을 창설하고 고아와 병자를 위해 사랑과 희생으로 눈물겨운 일생을 보내셨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려고 지리산 눈보라 속에서 십자가의 노래를 부르며 통곡하며 참회하시고 잃은 양 찾아 일생을 맨발로 다니신 한국의 성자였다. 이천년 삼월 18일 엄두섭 짓고 김흥호 쓰다.”
비문을 읽어 내려가는데 가슴 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오! 사랑하올 예수님, 제 마음을 꿰뚫어 주소서. 제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회개하여 언제나 주님께서 거처 하시는 집이 되게 하소서. 제가 하는 모든 말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제 생의 마지막을 미소로써 마무리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되어 모든 성인 성녀들과 함께 영원히 주님을 찬송하게 하여 주소서. 이제는 눈을 뜨고 아침에 일어날 때에 그 하루를 최후로 생각하고, 밤이 되어 자리에 눕게 되거든 임종하는 자리를 생각하게 하소서.
오! 예수님, 이 죄인을 굽어보소서. 흐르는 시냇물소리 청아하게 들리고, 묘지위에 부는 바람 내 영혼을 감싸 앉고 돌아갑니다.
아! 그리운 사람, 뼈에 사무치듯 그리운 사람, 눈 녹은 계명산 양지바른 언덕위에 말없이 날 오라 부르고서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사람, 그리워 그리워서 고개 숙이면 어느덧 눈물 가에 보이는 그리운 님이시여, 오늘도 이 죄인 그 사랑 못 잊어 다시 또 찾아와 눈물 흘립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걸어가신 나의 주님.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제자들, 사도바울, 어거스틴 성인, 프랜시스 성인, 웨슬레 목사님, 이용도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그리고 저의 스승이신 선생님도 이 길을 가셨습니다. 이제 이 죄인 차례인데 아직 익지 못하고 굼벵이처럼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이제 ‘무슨 일을 하든지 너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고 절대로 죄를 짓지 말아라’고 이 못난 죄인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철쭉꽃 향기 가득한 계명산 계곡에 조용히 엎드려 죽음을 묵상하며 사말(四末)의 노래를 읊어 봅니다.
“백년 천년 살듯이 팔딱 거리던 청춘이라 믿어서 염려 않던 몸 거기에도 죽음은 갑자기 덤벼 용서 없이 목숨을 끊어 버린다. 죽음에는 남녀도 노소도 없고 빈부귀천 차별도 없다. 하지만 설마 나도 그러랴 믿고 있더니. 이 설마에 결국은 속고 말았네….
의지 없이 외로운 너의 영혼이 이 세상을 마지막 떠나던 그때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였는지 네 얼굴이 그대로 말하는 도다. 지나가는 성도를 보기만 해도 제 양심이 보채어 피해 가더니 지공 지엄 사심판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홀로 꿇어 얼마나 떨고 지냈나?
온갖 맵시 다 차려 모든 사랑을 제 한 몸에 받으려 허덕이더니 송장 봐라 지겹다. 피해 내빼는 뭇 사람의 염오를 알고 있느냐? 남의 마음 끌려고 애도 쓰더니 참지 못할 독취를 내뿜고 있어 오는 이의 고개를 돌이켜 주고 피하는 자 걸음을 재촉해 주지!
집구석에 있기는 멀미가 나서 남의 눈을 피하여 쏘다니던 몸 좁고 좁은 널 속에 갇히어 있어 갑갑하게 그처럼 파묻혀 있다. 자나 깨나 생각던 불량자 동무 재미나는 그 틈에 왜 못 가고서 찬바람만 우수수 부는 벌판에 외롭게도 혼자만 누워있는가? 날 저물어 쓸쓸한 공동묘지에 귀뚜라미 구슬픈 울음소리는 네 영혼의 애타는 통곡소린가? 억 만 번을 울어도 때는 늦었다.”

한 번 사는 인생, 한국 강토의 산제물이 되어 돌박산에 묻히셨던 주기철 목사님처럼 예수님을 따라서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싶다.
“예수님을 버리고 사느냐, 예수님을 따라서 죽느냐. 예수님을 버리고 사는 것은 멸망의 죽이요, 예수님을 따라 죽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세상,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때도 이제는 지나가고 우리에게는 수난의 때가 박도했습니다. 물러갈 자는 일찌감치 물러가고, 예수님을 따라갈 사람은 한 번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십시오.
부활의 복음이 우리에게 이르기까지는 계속된 피 흘림이 이어져 왔습니다. 신앙의 죽음은 반드시 부활에 이릅니다. 죽음은 미지의 세계요 살아 있는 사람과의 사별은 애끓는 쓰라림에다 때때로 두려움까지 겹치는 갈등을 겪는 인생사 마지막 문제이지만, 신앙인들은 죽음의 다음 단계로 부활을 약속 받은 복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으로 가야만 하는 새로운 시간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신앙인들입니다. 부활만이 모든 선교와 신앙 확인의 결정적 증거입니다. 부활 약속이 있으므로 우리에게는 일사각오가 가능합니다. 일사각오를 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부활은 약속되는 것입니다.”

계명산 자락에서 바람이 불어옵니다. 바람결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죽음을 앞둔 주기철 목사님의 고백이 또다시 가슴을 사무칩니다. “주님을 위하여 열 번 백번 죽는 죽음은 영광이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것이 무슨 떳떳한 삶이 되겠습니까. 오! 주님 이 목숨을 아끼다가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겪지 않게 해주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의 사랑만을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저도 부활의 약속을 믿고 어떤 고난과 역경이 기다릴지라도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렵니다. 마지막 때의 진리를 위하여 이 한 목숨 바치렵니다. “아!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 님의 발자취 따라 좁은 길, 십자가의 길, 수도자의 길, 끝까지 따라 가오리다. 죽더라도 가오리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으면, 심판을 받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말단(末端)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사형 선고를 받고 나왔습니다. 이 사형집행 기일은 날이 갈수록 우리에게 육박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끔찍한 영원문제가 달려있습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한다면 죄를 범할 수도 없고, 주님을 멀리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을 뵈옵는 마지막을 순간순간 준비하는 이들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80 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곧 다가올 죽음, 우리의 묘비에는 뭐라 새겨 질까요? 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