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초(浮萍草)


나의 고향은 영등포입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 까지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 여름에는 여의도 샛강에서 헤엄을 치고, 겨울에는 썰매를 타며 자랐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모습들이 눈에 선합니다.
청년시절을 거쳐 주님을 만날 때까지 영등포일대를 맴돌며 살았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에 연단을 받으며 살던 곳은 광명시입니다. 아, 광명시! 그곳은 나의 영혼의 고향입니다. 그곳에서 영적 스승을 만났고, 말씀을 만났고 영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에 목회자가 되어 여러 가지 훈련들을 받다가 목회사역을 감당하기 시작하면서 고향과 광명시를 떠났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혈기방장 하던 청장년의 시절. 짧다고 생각하면 잠시의 세월이었지만, 길다고 생각하면 적은 시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전, 고향과 연단과 훈련의 무대였던 광명시 가까운 부천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20년의 세월동안 많은 곳들을 섭렵하였습니다. 은성수도원, 아바공동체, 밝은 빛 공동체, 멀게는 미국에까지 가서 목회사역을 하며 훈련을 받고 오기도 했습니다.
오랜만에 모임에 가기 위해 서울 시내를 가게 되었습니다. 낯익은 거리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20년 만에 어릴 적 살던 고향과 낯익은 거리들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20년 동안 변한 것도 많이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낯설지 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학교를 세 번이나 옮겨야 할 만큼 떠돌던 초등학교 시절, 가난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중학교 시절,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긍긍하면서 인생관을 길러갔던 청년시절,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앙훈련을 받던 신학생시절, 목회자가 되어 여기저기 목회사역을 따라 떠돌던 햇병아리 목회자시절, 그리고 수도원시절, 이민생활시절, 요 몇 년간의 시골목회시절들이 다 스쳐지나 갔습니다. 순간, 나의 인생이 그야말로 부평초(浮萍草) 같은 인생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부평초와 같다고 말들을 합니다. 남의 얘기려니 했는데 나의 인생 고백일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부평초(浮萍草)는 논이나 연못의 물위에 떠서 사는 작은 풀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개구리밥이라고도 합니다. 가을이 되면 겨울눈이 모체에서 떨어져 물밑에 가라앉아 있다가 겨울을 지나고 이듬해 봄에 물위로 올라와 싹을 번식합니다. 이풀은 한곳에 뿌리를 내려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바람 부는 대로, 물이 이동하는 대로 옮겨 다니며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풀을 타향살이에, 또는 이리저리 떠도는 인생에, 또는 덧없는 삶에 빗대어 말하곤 합니다. 아, 결국 나의 인생은 부평초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수십 년을 떠돌아도 어디 한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지금도 방황합니다. 환난이라는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떠돕니다. 세속이라는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겉돌고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는 영영 뿌리를 내리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인생을 정리하고 마감을 할 때가 다 된 것을 보니 결국 부평초 인생으로 마칠 것 같습니다.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의 삶인 것을 다시 실감합니다. 우리의 뿌리는 영원한 천국에서만 내려야 합니다. 지금은 환난의 바람을 따라, 세속의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떠돌지만, 그 바람과 물결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영원한 천국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부평초는 물위에 떠다니는 식물이지만 그 향기는 대단합니다. 꽃은 가장 작은 꽃들 중에 하나지만 가까이 가면 향기가 진동합니다. 누군가는 그 향기가 아득한 구름들이 쌓인 한 가운데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햇빛에 말려 약제로 쓰는데 이를 부평이라고 합니다. 한방에서는 이 부평이 해열, 이뇨, 코피지혈 등에 쓰며, 불에 덴 피부에 바르면 좋다고들 한답니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인생이지만 나를 통하여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떠다닐 때마다 주님의 향기가 진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치료하는 약재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섭리의 손안에 있는 부평초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작은 바람, 혹은 큰 바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 안에서만 불게 되는 환난의 바람이기에 그 안에서만 이리저리 흔들리기를 원합니다. 부평초의 꽃이 꽃들 중에 가장 작지만 활짝 피는 것처럼, 가장 작은 성령의 꽃이라도 피워 주님 안에 열매 맺기를 원합니다.

주님이시여!
환난의 바람을 불게 하옵소서.
물결이 치게 하옵소서,
작은 꽃들을 피게 하시어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주님이시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가운데도
주님의 향기를 발하게 하옵소서,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생명의 냄새’를 발하게 하옵소서.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당하는 영혼의 약재가 되게 하시고,
이 한 몸을 바쳐 주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결국 이 세상에서는 뿌리를 내릴 수 없어
영원한 천국에만 뿌리를 내리는
단단한 부평초가 되게 하옵소서!

이안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