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도수 선교사와의 만남
 피도수 선교사(1902-2012)는 1928년 2월 한국감리교회 선교사로 파송됐다. 전형적인 미국인이었지만, 당시 한국 사람이 되고자 무척 노력했다. 일본 경찰들이 자기를 향해 ‘서양사람, 서양사람’하면서 기독교를 방해하는 그들의 태도를 고쳐주기 위해서 “나는 미국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언쟁을 늘 했다.
김치와 비빔밥을 가장 좋아했으며, 당시 이화여전을 졸업한 한흥복 여사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결혼을 하고, 4남매의 자녀를 둔 파란 눈을 가진 한국 사람이었다. 강원도 금화 산골에 가서 개척교회를 세우고, 교회 건물도 한국식 기와집으로 손수 설계해서 짓고, 한국인보다 한국과 한국 사람을 더 사랑하였다. 선교사역을 하다가 대동아 전쟁 때 일본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했지만, 111세에 소천하기까지 한국인 목회자와 유학생을 도우며 한국사랑에 푹 빠져 한시도 한국을 잊어본 적이 없으셨다.
미국 어느 교회를 방문했을 당시 4박 5일간 집회를 하고, 피도수 선교사님을 너무나 뵙고 싶은 마음에 지인이셨던 김영철 목사님을 무작정 찾아 나섰다. 샌디에이고 역에서 잠깐 기도를 한 후 동양인 같은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혹시 김 목사님을 아냐고 질문하자, 멈칫하면서 금방 차에 올라타셨다. 운전석에 앉아 계신 까만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남자분이 나를 힐끔 쳐다보셨다. 그래서 김영철 목사님을 찾아가려고 한다고 재차 묻자 뜻밖에도 “제가 잘 아는데, 직접 모셔다 드릴게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집사이며 샌디에이고 연합회 회장님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김 목사님 댁에 들러 이용도 목사님과 친분이 있던 피도수 선교사님을 뵈려고 왔다고 하자, 오래 전 평양에서 이 목사님과의 만남을 밤새 풀어 놓으셨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흥분된 목소리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분을 만나 본적이 없다고 감격해 하셨다. 언젠가 만났던 강신찬 장로님 부부도 이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용도 목사님의 인격과 삶이 얼마나 큰 울림이 되었는지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다. 친절한 배려로 며칠 그곳에 머물면서 피도수 선교사님에게 계속 연락을 취하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연결이 안 되어 포기하려던 찰나, 집회를 다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정말 기적처럼 만남이 성사되었다.
둘째 딸과 사위가 피 선교사님을 휠체어에 태우고 나오셔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당시 106세의 고령이신데도 성령의 충만함에서 품어져 나오는 영적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피 선교사님은 그리움이 가득 묻어난 음성으로 한국에서 함께 했던 이용도 목사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데, 계속 눈물을 흘리셨다.
“어떻게 잊을 수 있습니까? 눈만 감으면 아직도 80년 전에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한국의 풍경, 정다운 한국 백성들의 모습이 눈앞에 훤하게 떠오릅니다. 특히나 이용도 목사와의 만남은 제게 너무나 특별하고 귀한 시간들이었지요.
그는 책과 성경을 많이 읽었고, 지나칠 만큼 기도에 매달렸어요. 내가 볼 때 너무 심하다는 느낌이 들어 기도생활도 절제해야 한다는 말을 해주면 그는 ‘내가 기도를 쉬면 하나님이 사탄과 싸움을 못하신다.’고 했어요.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일하시고 기도를 쉬면 하나님도 쉬신다는 분명한 신앙자세를 가졌던 분이지요. 기회만 있으면 기도를 하는데 그때는 대개 ‘금식기도’였지요. 정말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분이지요. 맞아요. 그는 성자라고 해야 해요.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면 쉬지도 않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갔어요. ‘형님, 너무 무리하면 죽어요. 좀 쉬어요.’라고 하면 ‘주님께서 애써 땀을 흘리면서 일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쉴 수 있나요? 머지않아 죽으면 주님과 같이 하늘나라에서 쉴 수 있을 터인데요.’라고 할 뿐이었지요.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기도하는 것이 예사였어요.
어느 날은 안타까운 마음에 정말 단단히 벼르며 간청을 했어요. ‘이러면 정말 죽어요. 반드시 오늘은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으니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기도해야지요. 죽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전도하는 것이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기도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배가 고파서 슬픈 것이 아니고, 가난해서 슬픈 것이 아니고, 기도하지 않으면 괴롭고 슬픕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어느 추운 겨울밤, 이 목사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는데 아침까지도 오지 않아 직접 찾아가 보았어요.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발자국도 보이지 않아 목청을 높여 ‘형님, 형님’ 계속 부르는데, 조금 떨어진 눈 더미에서 부스스 일어나는 한 형체가 보였어요. 바로 이 목사였어요. 밤이 새도록 눈을 맞으면서 기도를 한 것이지요. 이 목사가 집회를 거쳐 간 곳마다 회개와 기도의 열기가 불꽃처럼 타올랐던 것도 이에 기인한 것입니다.”
피 선교사님은 크리스마스 저녁에 있었던 에피소드도 들려주셨다. 이용도 목사는 어깨에 이불을 들쳐 메고 집을 나섰다. 밤중에 어디를 가냐고 하니 “오늘밤 천사를 만나러 갑니다. 천사를 보고 싶으면 같이 가시지요.“라고 하여 피 선교사도 옷을 주섬주섬 입고 함께 따라 나섰다. 칼바람이 살갗을 뚫는 밤,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불빛도 전혀 없는 캄캄한 굴다리 밑으로 들어갔다. 굴다리 밑으로 조금 걷다 보니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데, 그곳에 두 거지 아이가 벌벌 떨며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깡통에 불을 켜놓고 결핵으로 기침을 콜록콜록하는 두 아이를 이용도 목사님은 울면서 꼭 껴안았다. 그리고는 이불을 건네주며 다시 두 아이를 붙들고 애끓는 기도를 하였다. 피 선교사는 그날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하셨다.
“당시 온 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겨우 집에 돌아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린 것은 처음이었어요. 그때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게 무엇인지 똑똑히 보았고 깨닫게 되었지요.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아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나의 눈을 뜨게 해준 진실한 영적 스승이었습니다.”  
가쁜 숨을 내몰아 쉬며 눈물을 계속 흘리던 피 선교사님을 옆에서 지켜보던 따님이 안타까우셨던지 “아버지, 심장이 약하시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그만 말씀하세요.”라고 만류를 하였다. 그때 한 분이 피 선교사님에게 끝으로 소원을 여쭈어 보자 “한국에 가서 사람들에게 이용도 목사를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게 제 소원입니다.”라고 하셨다. 
사진 촬영을 하고 마지막으로 피 선교사님은 나의 손을 살며시 잡으면서 당부를 하셨다. “이용도 목사는 신앙이 인간의 본업이라고 하셨지요. 다른 부업에 다 실패해도 본업에만 충실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한국 교회의 빛이요 보배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며 기도의 용사로 사셨던 이용도 목사님의 삶이 피 선교님과의 만남을 통해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이용도 목사님의 생애를 듣고 삼각산, 갈멜산에 올라 미친 듯이 밤낮으로 기도했던 시절이 다시 사무쳐 온다.
새벽 녘, 뒷산에 올라 주님의 이름을 목청껏 부르며 간절히 기도를 드려본다.
“이용도 목사님처럼 제 혼을 빼내어 예수님께만 미치게 하여 주옵소서.”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