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휠체어 여인


여름이 가나 싶더니 신속히 가을이 들어왔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올 가을에는 순례자가 되고 싶습니다. 타박타박 걸어서 들과 산을 넘고 내를 지나 성인들의 향기가 있는 순례길을 떠나고 싶은 겁니다. 이 가을에….
며칠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지체 장애 여인의 부탁으로 휠체어를 밀어드리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가끔씩 밤에 휠체어를 미는 남편 되시는 분도 뵐 수 있었지만, 무언가 여운을 느끼면서도 대화할 수 없었는데, 감사하게도 이제는 그 여인을 직접 돕게 된 것입니다.
휠체어를 미는 첫 만남은 놀랍게도 헌팅턴증을 앓고 있는 윤중이네의 방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제 생의 시한부는 다 가고 있는 윤중이와 아빠는 주님의 은총 가운데 힘겨운 삶을 하루하루 살고 있는데, 휠체어 여인의 심방을 받은 것입니다. 이상하게, 그러나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만남이었습니다. 그녀는 9년 전에 스키를 타다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했습니다. 윤중이네는 아마도 9년 전쯤부터 발병하였던 것 같습니다.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서로를 향한 연민을 느끼며 순진한 마음들을 나눴습니다. 저는 왠지 미안했고, 왠지 행복했습니다. 세상의 이기심이 묻지 않는 깨끗한 만남은 길지 않았고, 우리는 돌아오면서 여러 번 서로에게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두 번째 만남입니다. 도우미도 가족들도 없는 시간에 또다시 봉사의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번엔 엘지아파트 내의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그분이 안내한 곳엔 숲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이런 아파트 숲길은 본적이 없습니다. 으름, 복숭아, 자두, 호도, 매실, 대추, 배, 사과, 이팝, 수수꽃다리, 인동초 등 30여 개의 나무와 식물들이 심겨져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로는 1층의 한분이 이곳을 가꾸는데 공유지지만 주민들도 좋아해서 그냥 둔다 했습니다. 그녀는 여기서 자유의 향기를 조금 느낄 수 있어 자주 온답니다. 뜻밖의 발견에 저도 참 좋았습니다.
그녀는 사고 후 마음이 가난해져서 예수님을 받아들였답니다. 그리고 이제는 좀 더 깊이 알고 싶다고 했고, 성경 전체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인가를 물었습니다. 참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생의 후반부가 시작돼서야 알게 된 예수님을 궁금해 하는 그 마음이….
아, 가난한 마음은 참 좋은 것입니다. 천국의 씨가 뿌려질 곳이요, 순진한 사랑이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할 때는 안중에도 없던 것들이 불구가 되자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39-41).
이 가을엔 본다 하는 눈은 감고 보지 못했던 눈을 떠 순례길을 떠나면 참 좋겠습니다. 휠체어를 밀면서 윤중이와 함께 진리로 인한 참된 자유를 꿈꾸며, 순결의 향기가 있는 곳으로 떠나면 참 좋겠습니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