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제목은 잉카의 지배를 받고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키타락사의
원주민 공동체에 전해져 오는 전설을 모아 묶은 책의 번역판 이름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로 애욕과 질투와 시기로 점철 된,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인간에게 그들이 가진 능력을 사용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죽이며 복수가
계속되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달리 잔잔히 흐르는 시냇 물과 같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순진함이 묻어나는 야이누 신화이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 위한 심심풀이 땅콩으로  하루 한 두장씩 읽었다.
별로 중요한 가치도 없는 그냥 쉽게  부담없이 그럭 저럭 읽어 가는 데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 가슴이 징-하는 여운을 남기는 절이 있다.
자질구레한 흙 속에서  그야 말로 모래 알 만한 황금을 채취한 것이다.

그것은 이들의 전설에 예수님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아기 예수님이시고 청년 예수님에 관 한 것은 죽음의 종류 속에서 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전설은 그 나라의 점령군들인 스페인과 함께 들어간
캐톨릭의 영향을 받은 뒤 생긴 것 같다.

내용인 즉
그들은 아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만 탄생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살고 있는 여러 장소에서 여러 모습으로 여러번 태어 나신 것이고
또 한 번 죽으신 것이 아니고 죄 없으신 예수님이 여러번 태어나신 그만큼
또 죽으시고 그 죽음의 뒤엔 언제나 부활하셨다고 믿는 것이다.

그 죽음은 목 잘림으로, 온 몸에 총탄을 맞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창에 찔림으로, 물에 수장됨으로, 능지처참으로, 모진 고문 당하심으로,
불에 태움으로, 채찍에 맞음으로, 여러 장소와 시대에 따라 그 사회가
속한 환경 안에 태어나셔서 그 사회가 주는 방법으로 여러번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마다 주님은 언제나 부활하셨단다. 부활하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들이 성령은 죽일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가슴에 쿵-하고 소리가 나면서 갑자기 어질 어질 해 져 왔다.

예수님은 꼭 예루살렘에서만 태어 나신 것이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장소에, 그리고 먼-옛날이 아닌 지금 태어 나신 것이다.
그 예수님을  날마다 나는 나의 방법대로  매번 죽인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성령님은 죽일 수가 없기에 내 안에서 다시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뻔뻔스럽게 언제나 엉엉거리고…………..

성령님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날마다 나를 세우셔서 회복 시켜
주시는 사랑의 횟수와 깊이 만큼 주님에게 고통을 주는 것 임을
알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간절한 회개의 기도와 함께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