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내 희망을 걸고 전부를 맡기겠다

죽음 이후의 평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맞아 전국적인 애도의 발길이 이어졌고, 대립했던 정치인과 정치세력도 추모를 통한 화해에 나섰다. 지역과 이념, 계층, 정파를 초월해 추모 물결이 확산되면서 국민통합, 민주주의, 한반도 평화 등의 유지가 부각되었다. 정치적 숙적들도 고인 앞에 마주했고, 정치적 각을 곧추세웠던 현 정부·여당도 조문했다. 사형선고를 내린 전두환 전 대통령과 평생을 정치적 라이벌로 숙명의 대결을 펼쳤던 김영삼 전 대통령도 빈소를 찾아 “오랜 동지이자 경쟁자가 돌아가 가슴이 아프다”고 애도했다. 1997년 대?패배 이후 야당 총재로서 시종 김 전 대통령을 비판해온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도 “민주화의 거목이 가셨다”고 추모했다. 추모의 움직임은 그가 생전에 추구했던 민주주의와 사회통합, 남북화해 등의 가치에 대한 공유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단 하루도 미사를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모진 고난의 세월동안을 지탱해 온 힘의 근원은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신앙적 행보를 살펴보다가 세례명이 토마스 모어인 것을 발견했다. 정말 우연처럼 자신의 삶과 닮은 분의 세례명을 가지고 있었다. 토마스 모어는 영국의 수상이면서 정의와 진리 앞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 순교한 인물로서 1935년 성인(聖人)으로 추대된 분이다. 시대의 흐름에 결탁하여 하나님을 저버리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신앙을 파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진리의 수호자였다.
토마스 모어는 1535년 7월 6일, 런던 탑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4계절의 사나이’라고 불렸고 문학자요 뛰어난 법률가였으며 영국의 수상이었다. 참수형의 이유는, 왕의 계승 법령과 영국 왕이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내용의 문서에 서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왕을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윤리적 가치관과 타협하지 않았던 그였다. 권위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충절이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고, 모든 수입을 잃었고 부동산은 몰수당했으며 가정에는 큰 위기가 닥쳤다. 사랑하는 가족들과는 헤어져야 했다.
왕위 승계를 서명할 경우 왕을 영국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승인하는 데 동의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양심은 나에게 국왕의 후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합니다. 그러나 국왕의 대주교 권을 승인하는 것은 내 영혼이 영원히 저주받는다 할지라도 서약 할 수 없습니다.”
양심선언은 적대자들에게 미움을 샀고 완전히 좌절하여 스스로 포기하기까지 집요하게 박해하였다. 감옥 안에서 집필을 방해하기 위해 펜을 빼앗았고 책도 차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심문은 불시에 반복되었고 식사량이 점차 줄었다. 가족들도 조직적으로 가난에 쪼들리게 하였다. 류머티즘이 도져 고통을 겪었으며 건강이 많이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신하로  
1534년 어느 날, 런던 탑 감옥에서 자녀들에게 마지막 남은 숯으로 편지를 쓴다. “내가 고통을 잘 참아 낸다면 이것을 내 인내심의 공로를 훨씬 초월하는 주님의 쓰라린 수난의 공로와 결합시키시어, 내가 연옥에서 당할 고통을 줄여 주시고 천상에서 받을 상급을 늘려 주실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내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그분께 맡기겠다. 그러나 내 잘못 때문에 버림받은 자 된다 해도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찬미와 영광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어떠한 일도 생길 수 없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겉보기에 그것이 나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참으로 가장 좋은 것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우리 주님께서 너희를 항상 참되고 의리 있고 정직한 사람으로 지켜주시길 빈다.”
그는 단두대 위에서 평화를 잃지 않으면서 잠시 하나님의 자비를 빌고 난 후, 그에게 용서를 청하는 형리를 포옹한 다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둘러 서있는 이들에게 왕을 위해 기도하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 선언했다.
“나는 왕의 충실한 신하로 생을 드립니다. 그러나 나는 그에 앞서 하나님의 신하로 죽는 것입니다.” 1535년 7월 6일이었다.
모든 명예와 부를 다 소유한 환경에 있었고, 아주 조금만 타협하면 그것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밝은 그의 양심을 조명했고 세상의 권력 앞에서도 선한 양심을 지켜내고 말았다. 모든 것을 잃고 감옥 안의 처참한 나날을 보내던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삶의 희망과 전부인 하나님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소유한 것이 무엇보다 값지고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전부를 거는 일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신다. 가라지와 알곡을 그대로 두시다가 추수 때에 구분하신다.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우리가 불의와 악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십자가의 군기를 높이 들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한낱 세상의 명예와 사소한 인정 앞에 하루에도 수 십 번 진리를 거스리고 주님을 뒷전으로 몰아내는 내 게으름과 연약함을 극복하고 싸워야만 한다.
토마스 모어처럼 우리의 기대는 주님이어야 하고 그분께 모든 희망을 걸어야만 살 수 있다. 주님께 전부를 맡기면 내 전부가 산다. 그러나 일부만을 맡기면 전부가 죽는다. 신앙은 주인이신 주님께 전부를 맡기는 일이다.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 안에 푹 젖어 살아가도 부족한 시간들이다. 헛된 희망은 시간만 버릴 뿐이다. 우리의 희망이며 전부가 되어야 할 주님. 그 주님을 주목하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 십자가 군기를 높이 들고 힘차게 달려가야 한다. 환한 미소로 힘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토마스 모어가 런던 탑 감옥에서 바친 기도

선하신 주여, 제게 당신의 은혜를 허락하소서.
세상이 제게 무가치한 것이 되게 하시고,
제 마음을 당신께 고정시키시어
사람의 입술의 축복에 매이지 않게 하소서.
홀로 있는 것에 만족하게 하시고
세상적인 사귐을 갈구하지 않게 하시며 세상을 조금씩
조금씩 완전히 버리게 하셔서
제 마음이 세상일에 대해서도 듣기를 원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제게는 세상적인 환상에 대해 듣는 것이 불쾌한 일이 되게 하소서.

기쁘게 당신을 생각하고, 간절하게 당신의 도움을 구하게 하시며,
당신의 위로에 기대게 하시어
열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저의 천함과 야비함을 제가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권능의 손아래 겸손하고 낮아지게 하시며,
과거에 지은 죄를 슬퍼하게 하소서.
인내로 역경을 이김으로 그 모든 죄악들을 씻어 내게 하소서.
여기서 기쁨으로 제 속죄를 감당하게 하시고,
시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걷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지난 일을 기억하게 하시고,
제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셔서 죽음이
제게 낯설지 않게 하소서.
지옥의 영원한 불을 미리 보고 생각하게 하시고,
심판이 오기 전에 용서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해 받으신 고난을 끊임없이 마음에 간직하게 하시고
베푸신 은혜에 쉬지 않고 감사하게 하소서.

제가 이전에 잃은 시간을 다시 사게 하시고, 헛된 잡담을 그만두게 하시고,
가볍고 어리석은 즐거움과 기쁨을 피하게 하시고,
쓸데없는 오락은 끝내게 하소서.
세상물질, 친구들, 자유, 생명을 포함한
모든 세상 것을 잃는 것이
그리스도를 얻는 일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하시고
증오와 미움으로 자신을 대한 형제들에게
요셉이 사랑과 호의를 베푼 것처럼
제가 가장 나쁜 원수를 최고의 친구로 생각하게 하소서.

모든 사람이 왕이 가진 모든 보화보다 이런 마음 갖기를 더 소망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인과 이방인이 모두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