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늪에서 소망의 문으로

이제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내 인생 여정을 되돌아본다. 마음의 무게를 돌덩이처럼 지고 살아온 50여년의 세월은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였다.
유년 시절은 삭막했다. 부모님의 사업실패로 하루 두 끼 죽으로 겨우 연명하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학교는 가야 했다. 고등학교 시절 이후 철이 들자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고향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18세의 나이에 비전과 꿈을 꾸었다.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돈을 벌어 사업가로 성공하는 길뿐이었다. 목표는 오직 돈 뿐이었다. “일단 공장에 취직을 하고, 50원을 모아서 중장비 학원을 다니자.” 굴삭기 같은 중장비 운전 기술만 배운다면 건설 사업에 뛰어들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공장 생활은 한 달 용돈 쓰기도 빠듯했다.
그러던 중 한 진도의 사람을 만나 “배를 타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하여 주저하지 않고 조금씩 모아 두었던 돈을 들고 목포로 향했다. 목포 선착장에서 어떤 불쌍한 소년을 만났고, 너무나 측은해서 밥을 사 먹이고 잠잘 곳을 안내 받았다. 조그만 여인숙에서 잠깐 씻으려고 점퍼를 벽에 걸어두고 세면장에 간 사이 그 아이는 나의 전 재산이 든 지갑을 가져가 버렸다.

순탄치 않은 인생길
우여곡절 끝에 난생 처음 조그만 꽃게잡이 어선에 올랐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왔지만 돈을 벌어야겠다는 일념이 뱃멀미도, 두려움도 이기게 하였다. 6개월 동안 꽃게를 잡아서 양식장에 가두어 두었다가 일본에 수출할 예정이었다. 다행이 꽃게잡이는 때마다 만선이었다. 충분히 50만원은 벌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하루 16시간 이상 고된 노동을 했다. 그러나 그 해 남해안 일대에 태풍이 극심했다. 꽃게 양식장은 쑥밭이 되고 태풍은 모든 꽃게를 깨끗하게 삼켜 버렸다. 너무도 참담했다. 결국 돈 만원을 받아 들고 서울로 와야만 했다. 너무너무 화가 났다. 그러나 다시 배에 올랐다. 이번에는 동지나해로 나가는 중선을 탔다.
1976년 당시 중선에 오르는 것은 곧 목숨을 담보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리 만치 위험한 일이었다. 한 달씩 바다에 떠 있어야 했고, 높은 파도와 싸워야 했다. 내 목표는 오직 돈을 모으는 것 하나뿐이었다. 이렇게 몇 년을 실망의 나날을 보냈고, 삶이 너무나 힘겨워서, 어린 나이에 자살까지 생각 했었다.
이렇게 모든 일들이 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자 점점 나의 성격은 폭력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수 없는 싸움으로 얼룩진 상처뿐인 삶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혀 술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활 가운데 술까지 마셨다면 아마도 지금쯤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후에 나를 사용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미리 그렇게 만드셨던 것 같다.

군 생활은 최전방 백골부대에서 했다. 철저하게 산 생활하는 훈련을 받았고, 후에 산에서 도를 닦을 때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훈련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군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전역 후 사회생활이 다시 시작되었고, 회사에 취직하면 단 3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조금만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을 휘둘렀다. 내 주위에는 무명 화가들도 많았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기에 쉽게 익히고 꾀나 잘 그린다는 평을 받았다. 그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었기에 마음은 평온했으나, 여전히 돈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한동안 그림에 심취해 있다가 용광로 일, 일용직 노동자, 급기야 광산까지 기웃거리는 삶을 살았다. 그야말로 극한의 일이라면 해보지 않은 일이 없으리만큼 별의 별 일을 다 해봤다. 결국 나는 세상과 인연이 없음을 깨닫고, 평소에 안면이 있던 보살과 도인의 도움으로 도 닦는 법을 전해 들었다. 그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30세, 비교적 젊은 나이에 태백산 깊은 골짜기 굴속으로 들어갔다. 속세의 사람들을 100일 동안 보지 않아야 하고, 반찬은 된장 하나, 그런 삶을 7년, 이산 저 산 굴속을 찾아다니며 이무기가 되어갔다. 사단은 나를 미혹했다. 법당에서 목탁을 칠 때면 환상이 아닌 실제 촛불에서, 또는 불상에서 내게 찬란한 빛을 비춰주곤 했다. 때로는 내 몸이 공중으로 부양하는 듯한 것을 느낄 때도 있었으며, 밤새 천둥, 번개가 일 때면 그 벼락 치는 소리에 내 그 동안의 한을 실어 보내며, 잔잔히 흥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도가 깨지기 시작했고, 나는 또 다시 절망의 늪에서 허덕였다. 도에 쉽게 심취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 한복 입은 귀신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사람만 사는 세상이 아님을 알았기에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놓아야 했다. 이 절망의 연속인 삶은 죽어야 끝날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지난 군 생활 당시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매주 완전군장 구보를 했는데, 그때 내가 낙오되면 전우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밖에 없었기에 끝까지 달릴 수밖에 없었다. 체력이 약한 나는 도중에 실신했고, 의무실로 실려 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의식이 회복될 즈음에 성령께서 내게 임하셨고, 나는 “나를 교회에 데려다 달라”는 간절한 소망의 소리가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당시 엄청 크게 소리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껏 그것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이다.

절망 끝에 찾아온 희망
지난날의 그 간절한 소망어린 몸부림을 깨닫고, 서른일곱 살 무렵 오산리 금식 기도원을 찾았다. 그 일 후 10여년 넘도록 사탄과의 싸움을 했다. 그 어려움의 시간들은 또 다른 고통과 시련으로 다가왔다. 나는 수차례 21일 금식을 하며 부르짖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내게 성령의 불로 임하셨다. 온 몸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절규했다. “하나님 제게도 제발 복 좀 주십시오. 복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은 “다만 기도하라.”는 말씀뿐이었다. 나는 1년가량 양평 금식 기도원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만 하고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기도 중 신학을 하라고 하셨고, 사방으로 막혀있던 환경을 열어 주셨다. J집사님을 통해 P목사님을 알게 되었다. 이 후 목사님의 권유로 심령부흥 대사경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빛 된 말씀은 나의 폐부를 찌르기 시작했다. 54년 동안 물질 때문에 절망하며 살아온 지난날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솔로몬의 영광도 들의 꽃보다 못한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하나님의 빛을 밝게 비추는 말씀을 들으며 그 동안의 절망이 사라지고 한없이 새로운 희망, 세상적이 아닌 영적인 희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영적성장을 통한 장성한 분량의 믿음으로 성장하는 것만이 인간의 유일한 참 기쁨이며, 소망인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 익은 열매되는 것이 신앙의 목표요, 내가 달려가야 할 인생 목표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빛 된 말씀은 나에게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마지막 소망이며 길이라 생각된다. 지난날 헛된 것에 소망을 두고 뜬구름을 잡으려 하며, 하나님의 원수 된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내 몸에 지극히 작은 상처하나 없도록 보전해 주셨음에 감사했다.

엄청난 은혜를 체험한 나는 충주에서 일하면서 신학교를 다니고 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아직까지는 내 사명이 무엇인지 뚜렷이 알지 못하지만 부지런히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는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 땅의 복이 아닌 천국의 복을 사모하게 하신 주님. 그분은 나를 깊은 절망의 늪에서 소망의 문으로 인도하셨다.
지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