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


내 잘못이 아닌 남의 잘못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생을 하거나 손해를 보고, 침 뱉음과 오해와 무시를 당하며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가 있다. 더욱이 주님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애쓴다고 했는데 모욕과 배신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러한 때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해질 수도 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2:19).
이러한 때 주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참지 못하고 같이 화를 내고 욕을 하면 추한 삶이 되는 것이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계속 쫓기다가 부하들과 마온 땅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다윗은 나발의 양떼를 돌봐주면서 온갖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말을 듣고, 부하들을 보내어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했다. 그런데 미련한 나발은 거만하게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하며 단칼에 거절을 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다윗은 배은망덕한 나발의 모습에 분개하여 시퍼런 칼을 뽑아 나발을 요절내 버리겠다고 태풍같이 달려갔다.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참고, 골리앗의 모독적인 저주도 참았던 다윗이 늙은 목축업자인 나발의 말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이 자기 가족을 진멸시키려는 정보를 듣자마자 신속하게 구원의 길을 모색했다. 다윗을 찾아가 남편 대신 용서를 구했고 나발은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피해를 당하고 모욕을 당해 불같은 분노가 솟구칠 때 보복을 하거나 되갚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도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잠26:4). 모든 일은 다 지나가는 것이다. 순간순간 멸시를 개의치 말고 자신의 일에 충실함으로써 자신을 극복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솔로몬은 말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애매히 고난을 당할 때, 잘 참고 견디면 우리의 영혼에 기쁨을 주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법궤가 성안으로 들어오던 날, 왕이라는 신분도 잊은 채 바짓가랑이가 내려갈 정도로 기뻐 뛰며 춤을 추었다. 그때 왕비 미갈이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를 주실지!”라면서 다윗왕의 자존심을 확 뭉개어 버렸다. 얼굴에 미소를 띠고 친절한 말 한마디로 귀띔해주면 됐을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표정만 살짝 보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미갈은 나발보다도 더 깊은 상처를 다윗에게 주고 말았다. 가장 가까운 아내로부터 빈정대는 말을 들은 것은 엄청난 아픔이었다. 그 이후에 다윗왕은 미갈에게 만정이 떨어졌다. 누구보다 미갈에게 동정과 안식과 확신과 사랑을 받고 싶었는데, 무시하는 그 한마디에 심정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가장들이 가까운 아내에게 미갈과 같은 대접을 받을 때, 기가 꺾여버려 의욕도 잃고 상처 난 가슴을 부여잡고 절망의 나락에서 헤매게 된다. 이런 굴욕적인 멸시 앞에 주저앉으면 추한 삶을 살수 밖에 없다. 그러나 찢어진 가슴을 부여잡고 전진하면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다윗이 자기를 멸시하는 미갈에게 “나는 여호와 앞에서 행한 것이다.”(삼하6:21)라고 말했다. 분노가 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만사를 하나님께 맡기는 상처 난 가슴이 그 말에 서려 있었을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먼저 우리 주님은 온갖 조롱과 멸시, 침 뱉음과 욕을 당하셨으나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다. 가룟유다의 배신과 유대인들의 야유와 채찍, 머리에 가시관, 양손과 양발의 굵은 쇠못이 뼈를 으스러뜨려 그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으셨으나 끝까지 참고 위협하지 않으셨다(벧전2:22-23). 주님의 삶은 고난 가운데 더욱 빛이 나셨고 아름다우셨다. 그리고 주님은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부탁하셨다. 원수 갚은 것을 자기가 맡아서 하신 것이 아니라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신 것이다.
잠언 25장 21절에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갚아 주시리라”라고 하셨다. 내가 나서서 보복하고 내가 나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을 불꽃같은 눈으로 통찰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처럼 조롱과 멸시를 받으신 분이 있을까? 같이 대항하시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던 분이 계실까? 아! 아름다운 삶이란 무슨 물질이나 명예가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맡기고 끝까지 참으시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장 2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혼의 목자’라 부르고 있다. ‘영혼의 목자’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미적인 표현이다.
밝은 빛 가운데 아름다운 삶을 사신 예수님의 제자 12사도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주님처럼 참고 하나님께 맡기면서 사시다가 익은 열매가 되셨다. 또한 사도바울도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맡기고 매를 맞을 때나 감옥에 갇힐 때나 주님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삶을 사셨다.

지난 청소년 수련회동안 우리교회 말썽꾸러기 노랑머리들 때문에 별의 별 소리를 다 들었다. 개야도 섬에서 수련회를 하다가 새벽에 동네사람들에게 불려갔다. 이 자식들, 당신이 데려온 애들이냐, 이 아이들이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달아나다 잡혀온 아이들이다. 욕을 하면서 경찰서에 신고하고 가만 안두겠다고 온갖 협박을 했다. ‘당신 어떻게 할거냐?’ 영문도 모르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몇 시간을 빌면서 간신히 해결이 되긴 했는데 노랑머리들은 계속 말썽을 피웠다. 어떤 분들은 ‘목사님 왜 저런 아이들을 우리교회 다니게 해서 교회가 이 모양이 되게 하느냐,’ 사경회 할 때도, 청소년 수련회 할 때도, ‘왜 저 노랑머리들을 데리고 와서 어지럽히냐’는 말들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아! 하나님 추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저 노랑머리 아이들의 모습이 제 모습입니다. 더 이상 말썽부리지 않게 해 주시고, 저들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이해를 받지 못한 분노에 찬 말을 들을 때는 더 가슴이 아프고 상처가 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 모두를 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다. 노랑머리들은 날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우리도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하며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는 노랑머리들, 그리고 형제자매들. 우리 모두를 아름다운 삶으로 익은 열매 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시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