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아침 신문을 펼치면 앞 면의 주제를
대강 훝어 본 후(시간이 없어 자세히 읽지 않고.)
지방 소식란으로 간다. 그곳에서 빼놓지 않고 읽는
부고 알림 소식. 그 중 특별히“Memoriam”이 있나
없나를 살펴 있다면 꼭 빼놓지 않고 읽는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자의 살아 있을 당시의 행적을
슬픔과 함께 글로서 알린다. 그러나 이 “memoriam”에
올려져 있는 이름은 많은 부고 명단들 가운데 한 사람
또는 둘 많으면 셋 뿐이다.

이 memoriam에는
사랑하는 자들을 떠나 보낸 날이 몇 년이나 흘럿건 만
그래도 떠난 자에 대한 그리움이 산 자들의 가슴에
남아 있어 그 사모의 정을 글로써 신문에 내는 데 그
짧은 내용이 마음을 적신다. 그들은 자기들 곁을 떠난
사랑하는 자들이 자기들이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이 글을 읽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 같다.

대개가 크리스쳔 적인 내용이다.
“우리 곁을 떠나 주님 곁에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는
당신에게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는 남편, 아내, 아들,
딸, 손자, 손녀, 친척, 친구들이 사랑을 보냅니다.
우리가 당신 곁으로 가는 날까지 안녕 “

“당신을 보낸 지 3년이나 됐지만 당신은 우리들의
가슴에 매일 새롭게 떠 오릅니다.
사랑하는 자여,
오늘 당신의 XX째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신문을 통해 천국으로 생일 카드를 보내는 것이다.

오늘 신문에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1999년
9월 11일 45살의 나이로 죽은 자의 memoriam이
한 줄 짤막하게 “ Unforgettable “ 이라며 흐느끼고 있다.
십년이라는 세월과 단 한 마듸의 단어가 주는 감동!

죽음이 무엇일까?
서로가 눈으로 볼 수 있고 육체 속에 감추인 情적인 것들을
함께 나누었던 이 모든 것들이 어느날 갑자기 안개 속으로
사라졌는 데, 떠난 자들은 말이 없고 남은 자들은 함께 한
세월을 잊지 못 해 늘 보고픔 속에서 오늘도 돌아 오지
않는 메아리를 그리워하며 아파한다.

“엄마가 돌아 가시면 절대 울지 않겠습니다.
험한 세월 고생 만 하다 좋은 곳으로 가신 엄마가 주님
곁에서 안식을 누릴 텐데 왜 울어요. 장송곡이 아니라 엄마
삶의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가를 엄마 앞에서 힘차게
부를 꺼예요”
어느날 아들이 내게 하는 이 말을 듣는 내 마음이
기뻐야 하는 데 약간 섭섭함이 있는 것은 내 믿음이 아들
보다 못하며 나도 별수 없는 인간 인가 보다?

나이가 나이 인 만큼 주변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언제 주님 오셔도 부끄럽지 않게,
또 갑작스럽게 주님 만나러 가는 날이 내 곁에 와도
내 주변 정리가 깔끔하게 되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아이들에게 진한 감동 남겨 어떤 사람 같이 10년이
지나도 사모의 마음이 늘 있어 표현을 실천 할 수 있게.

“나이가 들어 갈 수록 사람과의 관계에 맺힌 매듭 풀
여유가 없기에 사람 관계에 매듭 만들지 말고 또 어쩌다
맺힌 매듭 일랑 풀어 가면서 살아야 겠다.”고
언젠가 누구로부터 들은 말이 이 아침에 생각 난다.

내 나이도 적지 않게 먹어 가기에 나도 그러하리라.
이 다음,
주님 만났을 때 내가 살면서 주님 일 때문이 아닌
자신의 문제로 사람 관계에 맺힌 매듭을 들고 서신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는 부끄러움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