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열리는 기회의 문


새해 들어 일자리가 더 줄었다. 각종 경제지표를 보면 당분간 이런 사정은 더 심해질 전망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형편에다가, 이미 있는 일자리마저 내줘야 할 판국이다. 오죽했으면 ‘이퇴백’(20대 퇴직한 백수)이니 ‘삼초땡’(30대 초반에 명예퇴직)이라는 말이 나돌까. 모두들 위기라고 하는데, 대안은 없는가.

사는 게 뭐 이래
어느 대기업 간부에게도 불황과 구조조정의 여파가 몰아닥쳤다. “사는 게 뭐 이래. 이래도 되는 거야.” 뼈 빠지게 일한 죄밖에 없는데 회사에서 사직을 권고 당했다는 것이다. 아내에게 내색하지 못했지만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일자리 창출에 전력하고 있으나 경기가 회복되지 않는 한 한계가 있다. 궁극적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곳은 기업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위기극복의 처방으로 구조조정을 강조한다. 이래저래 어려운 현실이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또는 예상했더라도 어쩔 수 없이 위기를 당하기도 한다. 결코 길지 않은 인생 속에서 우리는 몇 차례 위기 상황에 접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과 같다. 조직이든 개인이든 마찬가지다. 자신이 잘못한 때문도 있지만 불가항력적인 것도 적지 않다.
혹자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말이 쉽지 누가 그걸 원하겠나.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위기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걸 어쩌랴. 그러나 넘지 못할 산이 없고 건너지 못할 강이 없는 것처럼 극복하지 못하는 위기도 없다.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위기에 좌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위기를 기회로 삼는 사람도 있다. 성경은 이런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라고 하는가?

죽고자 하면 살리라
안이숙 사모님이 미국 LA에서 가난한 이민자와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목회하던 시절이었다. 고생 끝에 200명 정도가 차게 되면서 새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유학생들이 먼저 장학금을 받는 데서 조금씩 떼어 매달 20불씩 2천불을 건축 헌금으로 작정했다. 또한 교회의 부인회에서도 5만 불을 작정했다. 비록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가난한 이민자들이었지만, 믿음으로 합심한다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줄 믿고, 김치와 된장, 고추장, 잡채, 만두, 옷 등을 만들어 팔아서 마련하기로 했다.
목사님은 거의 10만 불이 되는 약조금을 가지고 은행에 가서 20만 불의 돈을 얻느라고 진땀을 흘리며 바쁘게 다녔다. 약 500석 좌석의 교회를 지으려면 적어도 50만 불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내선교부에 가서 의논했더니, 20만 불을 도와주겠다고 허락을 받았다.
가난한 유학생들이나 이민자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감격과 흥분 속에서 교회 신축에 합심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부인회 회장의 노고가 많았다. 그녀는 딸 둘과 아들 셋을 키우느라고 남편과 함께 쉴 새 없이 뛰어야 했다. 너무 힘들게 일을 해서 그랬는지 그만 소화불량이던 위가 점점 더 통증이 심하여 병원에 갔더니, 위암이란다.
“내가 죽을병에 걸렸구나.” 그녀는 갑자기 죽음을 생각하니 예수님 앞에 설 걱정이 앞섰다. 그때 주님께서 ‘너 무엇 하다가 왔느냐? 날 위해 무엇을 했느냐’ 물으시면 어찌 대답할까” 고민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단번에 깨달았다.
사실 그녀는 음식을 제대로 먹어본 지가 오래 되었다.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피골이 상접했다. 언제가 갑자기 죽는다는 생각에 가만히 앉아서 약만 먹고 쉴 수가 없었다.
이튼 날 새벽에 남편이 일을 떠나자 차를 몰고 도매시장으로 달려갔다. 가서 무와 배추, 양념을 잔뜩 싣고 차를 몰고 곧장 교회로 달려왔다. 힘이 없어서 무와 배추를 한 개씩 손으로 차에서 내려, 물로 씻고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교인들이 다 돌아간 시간 부인회장은 주방에 무와 배추를 잔뜩 쌓아놓고 혼자 일하다 쓰러졌다 일어났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그 많은 무와 배추를 혼자 씻고 썰어서 김치를 담그고, 미리 준비해 놓아둔 김치병에 일일이 담아 봉하고 친교실에 전시해 두었다. 그리고 메모를 해 놓았다.
“건축 헌금을 위해 사가세요. 한 병에 3불이지만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께 바치세요.”
담임목사님이 이 사실을 알고, “양들은 이렇게 충성하는데 주여, 저는 참 목자입니까?” 하며 산으로 가서 혼자 엎드려 기도하다가 실컷 울었다.
한편, 이런 사실이 점차 알려지면서 부인회의 모든 회원들이 이 일에 적극 동참하여 회장을 거들었다. 이렇게 2년간의 피땀 어린 노고가 끝나고, 약정한 5만불을 다 채워서 뜨거운 눈물로 하나님께 봉헌하던 날, 교회에는 큰 잔치가 베풀어졌다.
모두가 기쁨으로 음식과 교제를 나누는데, 위암에 걸려 아무 것도 먹지 못하던 회장이 잡채를 꾸역꾸역 먹고 있지 않은가. “사모님, 저 회장님 보세요. 저렇게 먹다가 큰일 나는 거 아닌가요?” 사모님이 부인회 회장에게 다가가 말렸다. 그랬더니 “사모님, 잡채가 너무 먹고 싶어 나도 모르게 먹었는데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살살 녹아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죽으면 열리는 문
죽고자 한 그녀를 주님께서 살려주셨다!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봄이 아름다운 까닭은 혹한을 이겨내고 영롱한 꽃을 피우기 때문일 것이다. 위기의 끝은 실패가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요, 기회이기에 소중하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비슷한 경향이 있지 않을까. 위기와 고난 가운데 일궈낸 성공이 더 의미 있다.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해야 하는 사순절에 걸 맞는 말씀이리라 생각된다.
하나님께서는 위기라는 보자기에 싸인 축복을 우리에게 주신다. 왜냐하면 위기와 고난 속에서 우리를 연단하여 정금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마10:38)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주님, 모두들 힘들다고 합니다. 다들 위기라고 아우성입니다. 사순절의 주님을 묵상하며, 그 위기를 하나님의 기회로 볼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제가 죽고자 하오니, 기회의 문을 열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