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평안


책상정리를 하다가 작고 빨간 노트 한권을 발견하였다. 잠시 앉아 내용을 살펴보니 1년 전, 호주를 여행하면서 일기처럼 써 놓았던 글들이었다. 한참을 앉아서 그 내용들을 읽고 그때의 환경들을 생각하고 기분을 짐작하노라니 마음 한 부분이 아련해 졌다. 내가 쓴 글을 내가 읽는데 우습게도 마음이 아프다. 그 순간의 절절한 무거움들이 전달되면서 나도 모르게 휴, 한숨마저 쉬고 있었다. 지금은 웃음을 지으며 보고 있지만, 일 년 전의 호주 여행은 무겁고 지쳤고 아프기만 했던 순간이었다. 등짐 하나 지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틈을 걸어 다니면서 때론 더 지치기도 하고, 때론 무한한 해방감에 시원하기도 하고, 때론 극도의 절망감과 외로움에 울기도 했던 순간들. 그러나 나는 지금 이곳 내 자리에 다시 돌아와 있다.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며 희미한 웃음도 짓는다. 죽음처럼 무섭고 힘겨웠던 순간들도 지나가고 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희미함이 된다. 벼르고 벼르는 마음, 원망하고 미워하던 마음들, 그것이 아니면 정말 안 될 것 같은 절실한 소망들도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한순간의 일장춘몽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다, 지나갔고, 무엇인가 다가와도 또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보내고 맞이하고 보내면서 어느덧 천국에 이르는 것이리라.

요즘 큐티를 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주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그들, 바리새인들은 어딜 가나 날카로운 눈을 번뜩이며 꼬투리를 잡으려고 덤비는 사람들이었다. 말씀을 전하시거나 죽음에 이른 병자를 고쳐주시는 자리에도, 심지어 음식을 잡수시거나 길을 가는 순간에도 주님은 자유롭지 못하셨다. 늘 그들의 시야에서 판단과 비판, 정죄의 대상이 되셨다. 어디선가 짠, 하고 나타나 예수님의 행동 하나, 말씀 한마디를 꼬투리 잡고 어떻게 하면 걸려 넘어지게 해볼까 애를 쓰던 그들. 율법의 완성이신 주님에게 율법의 잣대를 들이 밀며 사랑으로 행하는 일을 변명해 보라고 말하는 그들. 신성과 인성을 다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 그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셨을 때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냄새에 역겨움을 느끼셨을까.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고 늘 평안하셨다. 왜 주님은 늘 그렇게 자유로우셨을까. 그 수많은 사람들과 매일 매순간 지치는 삶을 살아 가시면서도 그들에게 속하지 않으셨고 또한 그들 속에 속해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실 수 있으셨을까.

가만히 주님의 행적을 묵상해 보니 주님은 오래 머무르지 않으셨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최선을 다하시고 회복되면 다시 떠나셨고, 마음을 살펴주지만 역시 회복되면 또 홀연히 다음 사역을 위해 떠나는 일을 주저 하지 않으셨다. 그런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은 주님, 왜 그러십니까? 주님 그래야만 합니까? 라는 물음을 해야만 했다.

가란다고 섭섭 말고 오란다고 섭섭 마오.
가라니 가서 좋고 오라니 와서 좋지 않소.
자비한 주님 모신 곳이 어디나 평화의 집.
내가 나를 가져 봐도 허무한 것.
내가 세상을 가져 봐도 허무한 것.
그러나 내가 나를 주님께 바치면
내가 평안하고 내가 구원받는 것.

동광원 이현필 선생의 제자 김준호 선생의 글이다. 깊은 산속 고령의 몸으로 스승의 뒤를 따라 묵묵히 수도자의 길을 가는 그분은 언제나 꼿꼿한 매화 같으시다. 최춘선 할아버지의 절뚝거리는 맨발을 보면 따뜻한 신발을 신은 내가 부끄럽다. 세상을 사랑하여 가버린 데마의 이야기를 읽으며 비웃는 내 눈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악한 바리새인과 닮았다.
사람만큼 어딘가에 머무르기 좋아하고 떠나는 걸 슬퍼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천성적으로 정과 욕심에 이끌려져 태어난 존재라서 그것을 버리고 파는 과정은 쓰라림의 현장이다. 그래서 주님은 일찍이 훌훌 떠나는 모범을 주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물을 버려두고 나를 좇으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주님은, 소유가 많아 근심하며 가는 청년은 붙잡지 않았다. 그걸 버리고 오면 더 좋은 것을 얻는다고 권면하거나 훈계하지도 않으셨다. 그가 버리지 않을 것을 아셨던 것이다.
세상의 이치는 혈연, 지연, 학연 등 끈끈한 인연으로 인해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연루가 되어 비리가 되기도 한다. 근데 천국의 이치는 그 모든 것을 훌훌 바람처럼 지나가는 구름처럼 흘려보내고 넘겨 버려야 주님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언제나 정과 욕심에 이끌리는 인생들은 중심에 자기를 두곤 한다. 자기를 아끼고 보호하다보니 무언가 기댈만한 환경과 사람을 만들어 놓는다. 자꾸만 늘어가는 소유는 평안을 빼앗아가고 주님 앞에서는 긴 한숨만 나올 뿐이다. 많은 것을 버린 것 같은데 또 다른 것이 들어와 있고, 많은 것을 두고 온 것 같은데 새로운 무언가가 내 안을 차지하고 있는 어느 날을 발견할 때 얼마나 절망스럽고 우울한지 모른다. 또 언제 버리나. 언제 비우나. 다시 길이 멀어 진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애심을 끊어 버리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첫째, 스스로 자기 자신을 없이 보이도록, 남이 모두 자기를 업신여기도록 힘쓸 것.
둘째,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어 말하도록, 남이 모두 낮추어 말해주기를 바랄 것.
셋째, 본디 없는 몸, 자기 자신을 낮추어 생각하고 남이 모두 낮추어 생각해 주기를 바랄 것.

영성생활에 있어서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근본적 욕구에서 떠남을 말하는 것이다. 자꾸만 떠나고 비워지는 이치, 주님은 보여 주셨고 실천을 명령하셨다.
육신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 청빈양과 결혼하며 가난한 맘에 한 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을 노래하던 프랜시스는, 온 세상에서 주님이 만드신 모든 것들은 다 형제고 자매라고 불렀다.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에게 신비로운 주님의 찬미라고 노래하였다.
은수자(隱修者)로 사막 한가운데 살았던 샤를르 드 푸꼬(Charles de Foucauld)성인은 모로코의 탐험가였으며 부유한 가문의 멋진 장교였다. 고행자(苦行者)로서 생활을 선택한 그는 사하라 사막의 오지(奧地)에 은거하며 옛날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살으셨던 것과 똑같은 방식 그대로 흙처럼, 풀처럼 파묻혀 생활하였다.
그들이 버린 것은 세상이었고 사람이었고 안락한 도시였지만 얻은 것은 전부이신 주님이었다.

『내발을 씻기신 예수』라는 찬양의 후렴구에는, 먼 훗날 당신 앞에 나 설 때 나를 안아 주소서. 라는 가사가 나온다. 예수님 나를 안아주소서. 나를 기억하소서. 십자가상에서 절실히 외치던 오른편 강도의 고백이 오늘 나의 고백이 된다. 예수님을 얻기 위하여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들 감당하지 않으랴. 하늘은 언제나 비어 있지만 언제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충만하다. 텅 빈 충만. 주님만 사랑하는 길은 모든 것을 다 비워 내야 하지만 모든 것을 담는 은총의 길이다. 역설의 길, 버리는 평안, 주님은 사랑 때문에 죽으셨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