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힘이여, 기쁨이여!

어디서 왔는지 풍뎅이 두 마리가 방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마리가 내 무릎 밑으로 기어 들어왔다. ‘너 어디서 왔니? 참 잘 왔다. 이 넓은 세상 천지에 하필이면 나같은 죄인의 수도실을 찾아 왔으니, 참으로 고맙구나. 다른 사람들은 잘 버리고 떠나가는데 너는 이 외롭고 가련한 자를 찾아 줬으니 참 고맙구나. 아무 염려 말고 푹 쉬어라. 그리고 앞으로 잘 지내자.’ 풍뎅이는 내 말을 알아듣는 듯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와 날개를 폈다 오므렸다 하며 재롱을 부린다. “풍뎅아? 난 이제 ‘밝은 빛 기도회’에 갈 시간이니까 잘 놀고 있어라.”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풍뎅이는 책상 밑에서 자고 있었다. 자고 있는 풍뎅이를 혹시 깰까 책받침으로 살짝 들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나 주님을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밤은 깊고 고요하다. 풍뎅이도 잠들고 고요한 밤. 봄 비 내리는 소리에 잠 못 이루고 나는 왜 눈물짓는가? 할 말도 없이 주님을 바라보며 나는 왜 우는 걸까? 산 다는 것이 무엇인가. 지나고 보면 다 죄요, 어둠뿐인데 눈물 흘리는 이 굴레의 근원이 어디로서인가? 광야 같은 이 세상 무얼 위해 왔나. 누가 오고 싶어 왔나. 살다보니 지금까지 질긴 목숨 부여잡고 버둥거리며 죄만 짖고 살아왔지. 날마다 울며불며 눈물로 지새우는 밤. 누가 바람을 쐬러 가자고 해도 취미가 없고, 누굴 만나러 가자해도 취미가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버려진 고아처럼 울고만 있으니 어이할꼬.
내게는 생명의 근원이자 그분만이 나의 이 눈물을 그치게 할 뿐 세상 어떤 것을 준다 해도 채울 수 없으니, 아! 가련하고 불쌍한 이 죄인을 굽어 보사 자비를 베푸소서 그렇게 멀리하지 말시고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의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나 주님을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듯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애가 탑니다. 오늘도 몹쓸 원수 인간은 나를 비웃어 너의 찾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우롱하며 떠나갈 때 내 눈에 눈물을 삼키었나이다. 보소서. 내 주여! 풍뎅이도 제 보금자리 찾아 잠든 이 밤, 슬픈 노래 부르며 기도드리는 죄 많은 인생을 버리지 마소서. 아! 사랑하는 나의 주님 새벽 닭 울기 전 애타는 이 영혼 위에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소서. 사랑의 단비를 내려 주옵소서.”

사랑의 능력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없이 못 산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사랑 받지 못하면 떠나간다. 사랑만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요. 사랑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랑으로 한 것만이 상급이 된다. 사랑이 결국 모든 것이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첫째 서로 사랑함이요. 둘째는 모든 피조물에서의 이탈이며 마지막으로는 참다운 겸손입니다”라고 하셨다.
사람은 돈이 없고 가난해도 사랑만 있으면 살아간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고 좋은 집에 살아도 사랑이 없으면 살기 어렵다.
얼마 전 유명한 재벌가의 아들이 이혼한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봤다. 왜 이혼을 할까?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리라. 우리 속의 사랑을 최고도로 진동시키면 질병은 그 힘에 지고 만다. 곤충, 동물, 사나운 짐승, 심지어는 식물의 세계도 사랑의 입김을 불어 넣으면 감화 받아 굴복하고 만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사랑에 화합한다. 사랑 안에서 서로 일치한다.
사랑이 심장을 발동시켜 적극적인 사랑의 말이 오고 갈 때 우리의 에너지는 충만해진다. 그 때 우리 속에는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난다.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5분 실천할 때 가난한 사람에게 수십 그릇의 음식으로 구제하는 것보다 더 실효가 있는 위대한 일이라고 한다. 사회 최하층에서 학대받고 버림받은 가난한 자, 병자, 윤락인들이 고대하는 것은 물질적 구제가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말이다. 모든 실재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즉 사랑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기쁨의 상태 속에 압도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일치
인도의 마더 데레사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고대하는 것을 돈이나 물질이 아니라 사랑의 관심이라고 말했다. 많은 성인들은 예수님의 사랑 속에 일치 융합하고 도취하고 황홀해지는 체험을 영적 결혼이라고 표현했다. 성 베르날도의 신비주의를 『그리스도의 신비주의』라 하는데, 그것은 신부의 뜨거운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사귀는 합체 “영적결혼”이라고 표현한다.
산 인격이신 그리스도와의 결혼적 일치의 강렬한 사랑이다. 이때 자아의 의식에서 해방된다. 그리스도인의 궁극목표는 하나님과의 일치 즉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1:4).
토마스 머튼(트라피스트회의 수사, 신비주의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묵상에서 신을 보는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주님을 안다. 주님은 순수한 사랑이시기 때문에 홀로 당신만을 위해 사랑하시는 주님을 체험하기에 맛들이면 우리는 주님이 누구시며 무엇임을 체험으로 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위하여 신이 아닌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주님에 대한 참된 신비체험은 주님외의 모든 것을 깡그리 끊어버림과 동시에 온다. 우리의 정신과 의지가 모든 피조물에 대한 집착에서 완전히 해방되기만 하면 곧 주님의 사랑의 선물로 완전히 채워지기 때문이다. 피조물에 대한 집착을 끊고 벗어버린 그 만큼 주님을 체험한다. 다른 모든 욕망을 벗어 던졌을 때 불멸의 기쁨이 완성됨을 맛본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분의 본질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그분을 바로 인식할 수 없다. 만일 누가 하나님을 찾는다면 사랑이신 하나님은 더욱 그를 찾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시간은 하나님도 영혼과 더불어 말씀하시는 때이다. 하나님은 어떤 소리를 들려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영혼에 빛과 사랑으로 도우시는 힘을 주신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곧 사랑은 나의 존재이유라는 말과 같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참 ‘나’이다. 내 욕심을 차리지 않는 것이 참 ‘나’이다. 사랑은 나의 참 성격이다. 사랑은 곧 내 이름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일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만을 위한 것이 아닌 다른 것을 하거나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알거나 바란다면 내게는 기쁨도 평화도 안식도 충족도 깃들일 수 없다. 사랑을 발견하려면 하나님의 본질인 성소, 사랑의 감추인 그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랑이 없는 나는 사랑이 될 수 없다. 사랑이 나를 주님과 같이 만들어 주셔야 한다. 주님이 주님의 사랑을 내게 주시고 내 안에서 사랑하시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을 같이 하시면 나도 틀림없이 주님의 산 사랑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완전한 명상생활은 사랑의 바다이다. 순수한 명상으로 하나님 안에 사라진 사람. 그 때 거기는 하나님 홀로 남아 계시다. 주님은 거기서 행동하는 본체이시다. 거기서 사랑하고 알고 기뻐하시는 분은 주님 혼자뿐이다.”
기도의 비결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는 목마름이라고 했다.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을 사모하고 동경하고 열렬히 사랑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사랑의 밀담으로 사귄다. 머튼은 묵상 기도하는 사람의 목표는 내 영혼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접붙이고, 순수한 사랑의 정으로 우리 마음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 되게 하여 우리 정신과 의지와 온 영혼을 발전시켜 완성케 하는데 있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모든 피조물에 대한 애착에서 풀어 하나님의 사랑을 깊게 하는 노력과 수고를 해야 한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내게 피조물에 대한 사랑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소유를 팔게 하시고, 가까운 사람들을 떠나보내시고, 인간의 너풀거리는 끈을 끊게 하신다. 오직 하나님 사랑으로만 채우기 위해서….

사랑을 부어 주소서
사랑은 우리의 성화의 길잡이요, 우리 영혼을 살리고, 목적으로 인도한다. 사랑에 불타는 묵상으로 그리스도를 갈망하며 전적으로 마음을 바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살고 싶다는 불타는 소원에 사무친다. 부모자식 사이의 사랑이나, 친구사이나 남녀간의 사랑이나 어떤 사랑이든지 사랑은 그 대상과의 일치를 갈망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받는다. 사랑 안에 조화가 있고, 이해가 있고, 황홀한 기쁨이 있다. 우리에게 활기가 없는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기쁨이 없는 까닭도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아 8:6). 사랑은 놀라운 에너지이다. 사랑이야 말로 가장 두려운 힘의 원천이요 또한 최후의 완성이다. 영혼을 하나님께로 들어 올려 우리의 정신생활을 심화시키고, 성화시키는 원동력은 사랑이다.
성인들은 깊은 영적체험을 통하여 신의 세계를 엿보고서 신이 창조하신 우주의 근본요소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의 궁극적 본질은 사랑이요, 진리의 핵심도 사랑이요, 우리가 신과 만물을 바로 인식하는 길도 사랑뿐이다. 창조적 힘, 생산적 힘, 근원적 힘, 최대의 힘, 완성의 힘,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신비한 힘은 사랑의 힘이다.
마귀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창조하지 못하며 오직 파괴할 뿐이다. 성 베르날도는 “하나님은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하나님을 인식한다. 최고의 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고 말했다.
성 프랜시스는 새에게 설교했고, 굽비오의 늑대를 찾아가 타일렀고, 태양을 보고 형님, 달을 보고 누님이라고 불렀다. 이세종 선생님은 칡넝쿨도 밟지 않았고, 고사리도 꺾지 않았고, 개미를 밟고 울었으며, 부엌에서 독사를 살려 내쫓고, 물에 빠진 쥐를 건져주었다. 슈바이쳐 박사는 병원 건물을 지으려다가 개미집을 건드려 숱한 개미 때들이 밀려나오니 병원 건축을 중지시켰다고 한다.
만물은 사랑을 고대한다. 큰 사랑을 고대한다. 큰 사랑이신 예수님이 재림하셔야 이 세계와 인류문제가 해결된다. 아! 사랑이여, 영원한 사랑이여, 제게도 이 사랑을 부어 주소서.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