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찾아서(전1:13,14, 3:11)

    현대인을 옭아 매고 있는 각종 문제의 저변에는 치료하기에 힘겨운 ‘무의미”라는 병마가 도사리고 있다 한다. 부조리, 비정함, 무감각,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 시대 기류에 타협하기, 생각없는 행동, 제멋대로 흘러가는 세상을 용납하는 것(케세라세라) 등 이런 것들은 바로 ‘무의미한 삶’의 한 일면이다. 이런 무의미한 삶은 지금 현대인에게만 있었는 것이 아니다. 이미 3000년 전 삶을 뒤엎고 있는 헛된 삶의 상황을 파 헤쳤던 전도자가 있었다. (전1:13,14) 그 전도자 솔로몬은 삶의 의미를 모르고 목적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결론을 내린 후 이렇게 스스로 반문을 한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1:2,3) 반문한다. 곧 삶이 허망한 죽음으로 끝난다면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이 허무는 전도자 솔로몬의 발견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현실이다.
   그는 전도서에서 ‘헛되다’(meaningless)라는 말을 무려 37회를 사용하면서 삶의 허구성, 무의함을 낱낱이 파헤친다. 학문도(1:4-11), 철학도(1:12-18), 향락도(2:1-11), 유물론도(3:1-15), 자연신론도(3:1-4), 종교의식도(5:1-8) 등등 헛되고, 헛될 뿐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서 “악한 병이다”(6:2)라 했다. 전도서에서 ‘해아래서’라는 말을 28회나 사용하는데, 이는 시간과 공간을 처월하여 역사이래로 헛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말하고 있다. 현대 실존주의 철학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 파리에서 생겼다면, 솔로몬의 ‘헛되다’ 하는 절규는 이스라엘의 황금시대에 부러울 것이 없는 왕좌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솔로몬이 삶의 ‘헛됨’ 의미가 없음은 탄식하는 것은 한 허무주의자의 절망적인 고백이 아니다. 또한 기력이 쇠하여 무력해진 노인에게 삶을 체념하라고 권하는 것도 아니다. ‘헛된 삶’, ‘무의한 삶’에서 바로 삶의 의미를 찾아 살라는 것이다. 어떤 분이 전도서를 일고 이렇게 말을 하였다. “인간은 이 세상 전부를 가져도 만족을 얻을 수 없을 만큼 큰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했다. 이분 말처럼 인간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 채울 수없는 큰 공백이 있다.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들은 솔로몬이 허덕이듯이 허턱이면서 산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마귀가 안겨준 선악과이기에 이것으로 전혀 채워지지 않는다. .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 말씀과 같이  큰 영혼에 채울 수 있는 것은 영원한 것 뿐이다.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바 된 인간은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지작과 끝”이신(계22:13) 영원한 하나님으로 채워야 된다는 것이다. 곧 무의미한 삶에서 삶의 의미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있다는 것이다. 지혜서의 대표적인 말씀 잠언에서도 이 사실을 말씀을 하지 않는가? 지혜인 하나님을 가져라 이것이 세상의 무엇보다 귀하다 하였다.  솔로몬은 온갖 종류의 헛된 것에 대해서 논한 후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전12:13) 하였다. 곧 이것이 바로 삶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영생을 준다.
주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