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서 피는 꽃


어거스틴의 이야기
그는 북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이교도인 아버지 파트리치오는 성질이 매우 급하고, 명예 재산 등 현세적 사물에만 흥미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었고, 어머니 모니카는 꾸준한 성격에 독실한 신자로서 아들이 악에 물들까 항상 기도하고 타일러 주는 분이었다. 타고난 지혜와 재능이 출중함을 본 아버지는 그를 대단히 기뻐하며 장래에 큰 웅변가로 출세시키고자 더욱 세속적 사물에만 정신을 기울이게 했다. 그래서 그는 재능에 대한 자만심이 강해져 더욱 방탕한 생활에 빠졌고, 그 결과 16세에 한 여인과 함께 생활하여 아데오다토라는 사생아까지 낳게 되었다. 그러나 회개는 고사하고, 373년경 오히려 이원론(二元論)인 마니교까지 믿어 점점 더 이단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마니교 연구를 계속할수록 양심의 가책과 심중의 불안은 면할 길이 없었다. 거기다 가장 친한 친구가 불의의 죽음을 당하자 생사의 심각한 의혹을 품게 되어 더욱 번민은 심해졌고 결국 번민을 안고 로마로 향했다.
당시의 밀라노의 주교는 유명한 암브로시오 성인이었고 매우 유명한 웅변가라는 소문을 듣고 강론을 자주 들으러 갔다. 처음 동기는 단지 호기심에 불과했으나 차차 열렬한 진리의 탐구욕으로 변했다. 그러는 동안 암브로시오는 모니카를 알게 되었고 어머니가 아들의 영혼 구원을 탄식하여 눈물로써 호소할 때 “안심하십시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고 위로해 주었다.

어느 가을.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리비아에 사는 은수자들, 특히 성 안토니오에 대한 성스러운 극기 수도생활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나머지 소리치고 말았다. “아! 나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이냐? 무식한 자들은 온 힘을 다해 천국을 차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학문이 있다는 내가 육신의 노예가 되어 있다니, 이 무슨 꼴이냐?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일!”
당시 그는 명예, 재산, 결혼 등의 내적 갈등을 겪고 있었고, 다른 편에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해 살려는 소망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정원을 산보하다가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를 하고 있자니 “들어서 읽어보라! 들어서 읽어보라!”하는 어린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방에 들어와서 상 위에 놓여 있는 성서를 들어 페이지를 들춰보니, 맨 먼저 눈에 뜨인 것이 이러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1-14).

그 순간 하나님을 만났고 개종을 결단했다. 그 후, 아들과 친구 알리피오와 더불어 성 암브로시오에게 세례를 받았다. 얼마 후, 어머니 모니카와 아들 아데오다토까지 세상을 떠났다. 정든 어머니를 여의고, 귀여운 아들을 잃은 비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으로 깨닫고 보속하는 마음으로 감수하며, 고독한 몸이 된 여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그는 34년간, 반생의 비행을 보상하기 위해 전력을 경주했으며, 사제인 동료들과 공동생활을 하며, 청빈을 사랑하고 기도와 연구에 온 힘을 기울였다. 공동생활을 위해 정해진 규칙은 후에 수도회의 규율이 되었고, 육(肉)과 영(靈)의 심각한 투쟁 후 나름의 참회하는 마음으로 기록한 고백록은 많은 이들을 절망에서 건져주었고 회개하고 싶은 이들의 빛이 되어 주었다. 429년, 병상에 누워 병고를 하나님께 바치며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속죄의 시편 7장을 외우고 76세를 일기로 주님의 나라로 갔다. 8월 28일이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우리가 사는 지구는 매일 아프고 상처가 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아프고 또 아프다. 신종플루라는 병은, 처음엔 저 멀리 외국의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이젠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하루를 여는 신문과 인터넷 뉴스를 보면, 온통 범죄 집단의 하루를 기록해 놓은 것만 같다. 태어난 지 하루 이틀 된 아이를 버리는 기사도 가끔 등장하고,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거의 매일 올라온다. 폭력은 단골메뉴처럼 올라오고 자살 역시 건조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만큼 기사화 되어 올라온다. 타인을 비난하는 정치 기사는 이젠 보기가 싫을 정도이다. 익숙한 기사들은 사회를 냉담하거나 염려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독자들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하루가 멀다 하고 비슷하거나 더 자극적으로 바뀌어 올라오곤 한다. 너무나 흔한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얼마 전 부터 지구 멸망을 다룬 영화가 박스오피스의 높은 집계를 차지하는 이유는 소재가 주는 통쾌함 내지는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현대인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자꾸만 어둠을 향하여 치닫는 세상의 징조들을 두려워하고 근심한다. 그러면서도 또 무심하고, 누군가 나를 건드리면 잠재된 폭력성을 날카롭게 들이대며 파괴의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불안하고 어둡고 답답하며 지치는 세상, 그리고 사람들.
그들에게는 숨을 곳이 필요하다. 숨어서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이제 그만 다독여줄 영적인 쉼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르고 정확한 가치관을 정립해줄 진리가 절실하다.
한사람 어거스틴의 방탕과 타락을 위해 33년을 눈물로 기도한 어머니 모니카가 있다면, 이 극도의 타락한 사회를 살아가는 나와 이웃들을 위해 울어줄 이는 과연 누구일까. 지극한 기도와 인내, 사랑이 한사람을 성인으로 만들었다면, 먼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은 나는, 나를 위해 얼마나 울어야 하며, 또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는 얼마나 울어야 할까.

주님에게 숨어 사는 삶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며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 급박한 시대적 외침이 들리고 그 외침을 외면할 수 없는 오늘의 시대에 다시 하고 싶은 말이다. 주님의 마음이기도 하다.
어거스틴의 거룩한 일생이 오늘날까지 빛나는 것은, 그가 방탕의 삶을 살았던 분이었다가 위대한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르신 분이어서가 아니다. 깨닫고 과거를 떠난 이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만 일생 숨어 지내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을 전부로 푯대삼아 가면서도 자주 흔들리고 방황하며 주저앉기도 하는 연약함을 안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작은 환난의 바람이 불어와도 휘청거리며 흔들리고 떠나온 것들을 돌아보는 것이 우리들이다. 어거스틴은 돌아볼 것이 많은 분이었지만 그 어떤 유혹과 시련에도 되돌아보지 않고 일관되게 주님에게만 더 깊이 숨어들어서 거룩함을 이루셨다. 그 비결은 참회와 겸손이었다. 그는 주님을 한번 맛본 뒤로 기갈을 더욱 느끼고 주님이 그리워 못 견디는 삶이라고 고백한다. 주님을 맛보았다면 그분에게 빠져들어서 자꾸만 자꾸만 그분에게로 더 숨어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 낼 수 있고 더 깊어질 수 있다.
주님에게 숨어서 향기로운 영성의 꽃을 피우며 더 깊고 거룩한 데를 열망하는 행복함. 그러한 은총을 우리도 소유할 수 있도록 바라고 원하여 병이 날 정도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들처럼 말이다. 세상의 것들이 배설물처럼 여겨지는 고독한 선교사 사도바울. 이 세상 누구보다 더 주님을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던 꽉찬 영적 갈망과 열망의 24살 소화 데레사. 주님에게 미치자고 호소하던 33살 이용도 목사님. 주님이 계신 곳이 지옥이라면 나는 그곳으로 가겠노라던 사랑의 불꽃 청년 썬다. 40년을 병상에 누워 지옥 같은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진리를 전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눈 깜짝할 사이에 40년이 지난 것처럼 그저 행복하기만 하다던 무명의 증거자 공용복 선생님까지. 교회시대 이긴자들은 그렇게 주님께 숨어서 다른 아무것도 보지 않고 소유하지 않고 희망하지도 않았다. 주님뿐이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만큼 오롯하고 달콤한 일은 없어야 행복할 수 있는 광야길. 조금 느슨하게 풀어진 무릎은 일으켜 세우고 기준과 중심을 진리의 핵심에 바로 세워야만 주님을 주목할 수 있다. 누구보다, 무엇보다, 값지고 귀한 생명의 주님을 얻으려면 모든 것을 팔아서 사야만 한다. 그래야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자꾸만 주님에게로 숨어들자. 그 안으로 들어가서 거룩한 꽃을 피우자. 향기로운 영성에 취해 보다 드높이 살아보자.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