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들을 위해 아낌없이


에이즈, 조류독감, 사스, 탄저균 그리고 신종플루(H1N1)에 이르기까지 요 몇 년 사이에 인류는 바이러스에 의해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지금 전 세계의 가장 큰 보건 문제는 치료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제약회사들의 독점으로 그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데 있다. 대안은 무엇인가?

인명을 담보로 하는 자들
에이즈(AIDS)는 여러 가지 치료제를 함께 쓰는 이른바 칵테일 치료법이 발견된 뒤 고혈압이나 당뇨병처럼 관리만 잘하면 활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병이다. 그러나 제3세계 환자들 가운데 적절한 치료를 받는 비율은 1% 미만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마다 300만 명이 에이즈로 죽어간다고 한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요구하는 약값은 3백-7백 달러다. 그런데 전체 에이즈 감염인(잠복기간은 10년)이나 환자의 63%인 2천450만 명이 사는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의 경우, 전체 인구의 44%가 하루 1달러 미만의 소득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 조류독감 치료제 타미풀루의 경우, 학자들은 조류독감이 중세 유럽에서 발생해 당시 인구 1/3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 못지않은 위험한 전염병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조류독감은 한번 걸리면 사망률이 50%나 넘는 무서운 질병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조류독감의 유일한 치료제는 타미풀루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조류독감의 폭발적인 감염을 막으려면 최소한 전체 인구의 15% 이상이 복용할 수 있는 분량의 타미풀루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그런데 문제는 생산이 한정돼 있어 2020년이 돼야 그런 정도의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물량이 나오는 족족 사재기를 해서 구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혹 또다시 조류독감이 전 세계적으로 번진다면 끔찍한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특허를 풀어 대량생산의 길을 열고, 인류의 생명을 지킬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게 현실이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에드워드 소크 박사는 “태양에 특허를 신청할 수는 없다”며 자신이 개발한 백신의 특허를 포기하고 전 인류에 개방하였다. 이로써 백신 1개의 값은 100원 정도, 누구나 싼값에 백신을 접종할 수 있어서 지금은 전 세계에서 소아마비가 거의 퇴치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좋게 하기 위해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 장기려 박사님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해
그는 의대를 지원할 때 이렇게 기도하였다.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6·25 때 월남한 그는 1951년 7월 1일 부산에 무료 진료소인 복음병원을 설립했다. 소문 듣고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도저히 운영이 어려워 돈이 없는 환자는 받지 않고, 있는 사람은 조금씩 형편대로 받기도 했다. 또 치료비가 없다고 사정하면 대신 내주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있으면서도 없다고 하는 환자도 있었다.
어느 날 어떤 환자가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와서 돈이 없다고 사정하니까 그대로 믿어주었다. 옆에서 보는 직원들은 속고 있는 원장이 하도 답답하여 물었다. “원장님, 저 환자가 진짜 돈이 없는 줄 아십니까? 그 손에 끼고 있는 다이아 반지 못 보셨어요?” “보았지. 그러나 그가 지금 돈이 없다고 하면 믿어야지. 나는 속여도 하나님은 못 속이지. 안 그런가? 그런 사람 한두 사람 때문에 정말 돈이 없는 환자들까지 의심하게 되면 큰일 아닌가?”
한번은 경남 거창의 한 가난한 농부가 입원비가 밀려 퇴원을 못하고 있다가 원장님을 찾아가 하소연 했다. 사정을 듣고 대신 병원비를 내주려고 주머니를 뒤졌으나, 마침 주머니에 돈이 없자 한 가지 묘안을 알려주었다.
“오늘 밤에 문을 열어 줄테니 그냥 살짝 도망쳐 나가시오.” 그 말에 농부는 깜짝 놀랐다.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낼 돈은 없고 병원 방침은 통하지 않고…. 당신이 집에 빨리 가서 일을 해야 가족들이 살 것 아니오.”
그날 밤 모두 퇴근하고 난 뒤, 병원 뒷문을 살그머니 열고 이불 보퉁이를 든 환자와 가족이 머뭇거리며 나왔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차비요. 가서 열심히 사시오.” 농부는 가슴이 막혀 눈물만 흘렸다.
다음날 아침, 서무과 직원이 놀래서 “원장님, 106호 환자가 간밤에 도망쳤습니다.” 했다. 원장님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도망치라고 문을 열어주었소. 다 나은 환자를 병원에 붙들고 있으면 그 가족들은 어떻게 살겠소? 빨리 가서 농사를 지어야지. 지금이 한창 농번기인데….” 원장실을 나오는 직원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내 것이라 하지 않고
1968년 5월, 장기려 박사님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 발족되었다. 조합원 700여 명, 월 회비 60원, 담배 한 갑에 100원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운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계속 감당했을 때, 외부의 원조와 후원자들의 조력으로 5년 만에 흑자를 내기 시작했고, 이후 약 20년간 더욱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담 없이 진료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1989년 7월, 가입자 22만 명, 지정 병원 440곳이었던 청십자 조합은 국가에서 농어촌 지역뿐만 아니라 도시까지 의료보험을 전면적으로 실시하게 되어 해체를 결정하게 됐다.
“이제 나라에서 이 일을 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나라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일을 청십자가 대신 맡아왔을 뿐입니다. 우린 징검다리 역할에 만족합니다. 이제 기쁜 마음으로 넘겨주려 합니다.”
박사님은 20년 노하우를 지닌 조합의 직원들을 정부 의료보험조합에 배치하도록 도왔다. 그들은 이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었다. 즉 청십자 조합은 정부 조합의 모판이 되었던 것이다. 박사님은 내 것이라고 붙들지 않고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과정일 뿐이라고 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25:40)는 말씀과 같이 사셨다. 6·25 전후의 부산은 피난민들과 행려병자들, 가난한 환자들이 즐비한 도시였다. 이런 곳에서 박사님은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었다.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이기적으로 독점하지 않고 작은 자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주님, 주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붙들고 있는 저의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저도 장기려 박사님처럼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는 삶을 살게 하소서!”
이상화